11월, 2024의 게시물 표시

그걸 왜 꼭 내가 해야 하지?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던 , 제가 대학생 때 활동했던 선교단체는 선교 활동과 소속 간사 , 선교사들이 단체의 지원이나 지급이 아닌 모두 ‘ 자비량 ’, 즉 , 개인이 스스로 후원을 받아 활동을 해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 학생으로 있을 때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 그리고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3 년간 간사를 하면서 저도 ( 잠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하며 돈을 벌긴 했지만 ) 후원을 받아 활동을 했습니다 . 때때마다 기도편지를 참 많이 썼습니다 . 누군가에게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하려는 일 ,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설득시켜야 합니다 . 정기 , 부정기적으로 기도편지를 발송하고 , 후원자를 만나 기도 제목을 듣고 , 연말이면 작은 선물도 준비해 보내면서 후원자가 자신을 계속 후원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리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 ‘ 후원 ’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 일반적인 개념으로 쉽게 설명하면 , 그것도 일종의 ‘ 영업 ’ 인 것입니다 . 그 영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홍보해야 하는데 ,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확신과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나는 왜 월급도 주지 않는 이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 선교사로 파송 받으려고 하는가 ? 내가 하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가치 있는 일인가 ? 그렇게 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 ? 그걸 왜 꼭 내가 해야 하는가 ? 이런 질문에 자기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 , 그 답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 돈을 주지 않는 그 단체에서 ‘ 버티며 ’ 계속 일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일종의 자기 최면이지만 , 그것마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 세상의 다른 대부분의 일들도 이런 생각과 믿음이 없으면 그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없고 , 버티기도 쉽지 않습니다 . 그래서 저...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 시작하면서,

 *논쟁이나 욕설이 목적이 아닌 문의나 (반가운) 안부 인사를 담은    인스타그램, 트위터, 블루스카이 DM은 언제나, 누구나 환영합니다.   오늘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퀴어하게 읽고 , 해석하며 , 적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 물론 성경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앞서 계속 나눴던 제 일상과 짧은 생각들도 번갈아 가면서 올릴 것입니다 . 퀴어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한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 먼저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 교회 지도자들의 말과 교회 공동체의 분위기 , 전통을 참 잘 따르고 , 의심하지 않습니다 . 그들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불경하고 , 위험하며 , 성경 해석은 아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함부로 해석하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질문하지 않는다면 , 배울 수 없고 , 변할 수 없으며 , 성숙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 모든 변화와 깨달음 , 성숙과 성장은 모험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 종교개혁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가 면죄부를 팔며 , 교회의 권위와 전통을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고 그것을 정당화하던 시기에 , 거기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며 , 고민하고 , 싸우지 않았다면 , 개혁도 , 개신교회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며 , 가톨릭 교회도 변화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그러니 , 퀴어인 내가 성경이 퀴어인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 하나님은 퀴어 사람인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바라보고 계시는지 , 질문하는 것 , 고민하는 것 , 싸우고 부딪혀 보는 것은 오히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 성경을 퀴어 관점으로 읽고 해석한 내용들을 소개하면 , 퀴어 당사자인 기독교인 본인조차 그런 것은 성경을 너무 작위적이고 ,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요 ? 질문하며 , 그렇게 퀴어 관점의 성서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반응들을 어...

2024 '퀴어', '목사' 라이언의 감사

 *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당연히 비문이 존재하고 , 글의 구성과 흐름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    그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실 지금부터 쓸 내용을 쓰려고 , 앞의 글에서 제가 대학생 때 활동했던 선교단체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 쓰다 보니 ‘ 이건 이렇게 연결해야 하겠다 ’ 가 반복되어 앞의 글이 되었습니다 . 지금부터 쓰게 될 글도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오늘은 두 개의 글을 씁니다 . 하루 지나 쓰게 되면 쓰려고 했던 내용을 잊을 것 같아서 , 늦게 자고 , 이 글을 씁니다 . 미국은 오늘 , Thanksgiving Day, 추수 감사절입니다 . 내일이 Black Friday 인데 저는 딱히 살 것이 없습니다 . 사실 뭘 살 돈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저는 목사이며 , 오늘은 ‘ 감사 ’ 가 주제인 날이니 , 감사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 앞의 글에서 말했던 선교단체 활동을 하던 시기에 , 외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 강사로 왔던 분이 어느 유명한 목사의 말을 인용하며 소개했던 문장이 있습니다 . “ 감사는 하늘 ( 하나님 ) 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 그게 벌써 몇 년 전 , 이제는 어릴 적이 되어 버린 시절에 들었던 내용이지만 ,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 저 문장이 마음에 참 많이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 강사는 저 문장을 이용하면서 , 어떤 큰 일을 경험했을 때 , 큰 감사만 하려고 하지 말고 ,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감사를 해보라고 가르치면서 , 감사 노트라는 것을 써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 정말 아주 작은 것 , ‘ 오늘 무슨 음식이 먹고 싶었는데 , 학교 식당 갔더니 그 음식이 있더라 ’, ‘ 버스를 놓칠 뻔했는데 그 버스가 가다가 멈춰서 탈 수 있게 되었다 .’ 와 같은 것을 그냥 보내지 말고 적어서 기록으로 남겨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 그...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 ( 어쩌다 보니 ) 이번 글은 조금 길어졌습니다 .   한국에서 학부와 신학 대학원을 다닐 때 , 제 삶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것이 바로 선교단체 활동이었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면 , 학부생은 연애도 못하게 했던 ( 정확히는 4 학년 1 학기까지였던가 ?) 그 선교단체 활동을 뭐 그리 열심히 했나 싶고 , 그때도 저는 항상 도망 다니고 , 그리 적극적인 멤버는 아니었음에도 , 그 때의 추억과 배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 이 단체는 개별 캠퍼스 활동과 더불어 매주 서울 인천 경기 지역의 학생들이 모여 같이 예배를 드렸고 , 여름에는 매년 지역 혹은 전국 단위로 수련회를 했으며 , 겨울애는 해외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 같은 캠퍼스가 아닌 서울 인천 경기 지역 전체 대학의 소속 학생들을 나라별 , 특기별로 지원을 받아 섞어서 팀을 만들었기 때문에 , 다른 선교단체들에 비해 자신의 학교만이 아닌 다른 학교 학생들과 교류도 활발한 곳이었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면 , 아니 그 때는 대학생들이 할 일이 없었나 ? 싶은 그런 일이지만 - 그래서 안 그래도 다른 대학생 선교단체들에 비하면 규모가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은 그런 정도의 선교단체였고 , 그래서 지금은 단체의 규모 자체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년 작아지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지만 - 어쨌든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그런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건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 이성애 연애조차 못하게 하던 그 단체를 정말 사랑하면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 이 단체의 특이점은 또 원하는 사람은 6~8 개월동안 공동생활을 하며 강의를 듣고 , 해외전도여행을 하는 선교훈련 프로그램이 있는 곳이었는데 , 8 개월 프로그램은 한국의 대학생들이 방학 - 학기 - 방학 기간동안 공동생활을 하는 와중에 학교를 다니고 , 방학동안 전도여행을 다니는 방식이었고 , 6 개월 ( 혹은 5 개월 ) 프로그램은 아예 그 프로그램에 전념해서 3 개월동안...

청소를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정신분석을 공부할 무렵 , 운전해서 다니던 차가 말썽을 부리고 , 크고 작은 접촉 사고들도 연이어 났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 수업에서 그런 상황들을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 교수님께서 분석 상황에서 본다면 그것 또한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뭔가 이야기하고 분석해 볼 대상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 물론 그 사고와 정비들은 제가 원인이었던 것도 있지만 , 타고 다니던 차가 중고차들이라 고장과 결함이 있었던 것도 있었고 , 상대방의 과실이었던 것도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 무의식과 정신 역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건 분명 과도하고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그 때 그렇게 지나가듯 던진 교수님의 말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 그 사고들의 원인을 무의식의 작용과 사고로 분석하긴 어려워도 , 교수님의 그 말이 저의 무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쳤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 교회를 건축하느라 마음과 상황이 복잡한 시기였고 ,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목사가 되고 , 정체성을 인정하고 , 이쪽 사람들을 만나며 , 막 이쪽 경험들을 쌓고 있던 - 애기 호모 - 시기였기에 저의 내면 세계와 심연 , 무의식의 공간도 복잡하고 좌충우돌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 청소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 외출할 일이 없기 때문에 , 옷을 차려 입고 신경 써서 입지 않게 된 것이 오래 되었음에도 , 방 한구석에는 아무렇게 벗어놓은 옷들이 쌓여 있고 ,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책상 겸 식탁 위도 휴지와 쓰레기들이 그대로 있으며 , 바닥에는 배달 음식을 먹고 난 흔적들 - 박스와 종이백 - 들이 굴러 다니고 있습니다 . 부엌 쪽 상황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며 그 외의 말들은 모두 변명에 불과하지만 , 제가 통과하고 있는 우울과 무기력의 시간들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 하고 싶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 자고 일어나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책상과 바닥을 볼...

이럴거면 더 일찍,

  어린 시절 (?), 군에서 막 전역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만 하더라도 저는 후회라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 아니었습니다 .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지 , 아니면 ,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큼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 본 탓인지 , 언제부터 후회라는 것을 한 번씩 해보게 됩니다 . 주제가 ‘ 후회 ’ 라서 이번 글에서도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저의 후회는 , ‘ 이럴 거라면 더 일찍 나와야 - 더 일찍 정체성을 인정하고 , 이쪽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야 - 했다 .’ 입니다 . 퀴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시간을 통과합니다 . 저는 제가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중학교 때부터 알기 시작했습니다 . 물론 그보다 어린 시절에도 남다른 (?) 면모들이 있었지만 , ‘ 아 ~ 나 남자 좋아하는구나 ?’ 하고 자각했던 것은 그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아주 훌륭하고 열정 넘치는 개신교 꿈나무였던 저는 당연히 그런 생각과 욕구들을 ‘ 음란 ’ 과 ‘ 죄 ’ 로 여겼습니다 . 열심히 싸웠습니다 . 대학교 때 선교단체 활동을 하면서도 기숙사 방 한구석에서 게이들이 모여 있는 다음 카페에서 남자 사진들을 구경하고 , 기독교 이반 카페에도 가입해서 기웃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 기독교 이반 카페에서 어떤 형과 대화를 나누고 그 형 집까지 가서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이 보던 미드 ‘ 위기의 주부들 ’ 을 같이 봤는데 , 막상 다 보고 누워서 뭘 해야 할 때가 되자 , 물기도 하고 빨기도 했는데 , 삽입과 사정까지 하면 정말 ‘ 죄인 ’ 이 될 것 같아 그 바로 직전에 형에게 그만 하자고 말하고 정말 문자 그대로 손만 잡고 잤던 기억도 납니다 . ( 그 때 했어야 되었는데 … 정말로 이쪽 사람들을 만나고 이쪽 경험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 우습게도 목사가 되어 군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던 바로 그 해였습니다 . 지금까지 가장 친하...

주께서 꿈에라도 말씀해 주신다면 참 좋으련만,

  유학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 내가 나로 , 거짓말하지 않고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 교회도 목사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없는 이 시대에 , 안정적인 월급과 집 , 연금을 보장받는 군목이라는 직업은 정말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군생활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 장기복무 지원을 했을 때 , 선발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성과는 가자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결혼을 해야 할 것이고 , 한국에서 퀴어이면서 목사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먹고 사는 것을 위해 , 노후 보장을 위해 , 눈 딱 감고 최소 20 년 ( 정확히는 19 년 6 개월 - 이후부터 연금 수령이 가능함 -) 을 버티며 교인들을 속이고 , 나를 감추면서 일을 계속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면 패기가 아니라 객기였고 , 도전이 아니라 도피였습니다 . 저는 학부 시절을 당시 화요모임과 캠퍼스 워십으로 , 부흥이라는 앨범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유명했던 선교단체에서 보냈습니다 . 겨울이면 이슬람권과 타문화권으로 전도여행을 다니고 , 6 개월동안 공동생활을 하는 선교훈련도 따로 받았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그 곳 또한 , 당연히 퀴어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 그렇지만 저는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 내가 믿고 , 배우고 ,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은 퀴어 사람들을 미워하고 , 저주하며 , 몰아내는 복음이 아니라 그들도 다르지 않으며 , 그들도 존재 자체로 충분히 자격이 있고 , 그래서 예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인데 , 그게 정말이라면 , 내 믿음과 확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 주께서 전과 같이 , 이제도 , 앞으로도 동일하게 내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이고 , 길을 보여 주실 것이고 , 말씀하며 음성을 들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 공동체 , 그 선교 단체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내 믿음과 확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 내가 내 삶으...

변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 더 정확히는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 그렇습니다 . 그래서 음악을 포기했고 , 논문을 제대로 쓰지 못했으며 , 영어도 잘 하지 못합니다 . 이 블로그를 시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벌써 몇 년 전부터 퀴어 기독교인 , 퀴어 사람들을 향한 설교나 목사로서 제 이야기를 담은 팟캐스트 혹은 유튜브 컨텐츠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 그렇게 생각만 하고 ,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 저는 지금 , 저의 게으름에 , 구차한 변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교회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 , 북미와 한국에 있는 퀴어 사람들에게 온라인 예배이지만 퀴어 사람들을 환대하는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꾸준히 알리면 그래도 알음알음 몇 명의 사람들이라도 이 예배를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 다른 한편으론 이미 많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 나라도 이런 교회 , 이런 기독교 공동체라면 정을 떼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 같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한국교회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퀴어 사람들을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 그전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회들로 인해 고통을 경험하고 , 공동체를 떠나며 ,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기로 결정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떠난 마음 , 떠난 사람들을 다시 교회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불러 모은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 현실로 경험했습니다 .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시작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바로 그런 분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 교회를 다시 찾는 것이 내키지 않더라도 ,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만큼은 ,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 이미 많은 사람들이 팟캐스트보다 유튜브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