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더 정확히는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포기했고, 논문을 제대로 쓰지 못했으며, 영어도 잘 하지 못합니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퀴어 기독교인, 퀴어 사람들을 향한 설교나 목사로서 제 이야기를 담은 팟캐스트 혹은 유튜브 컨텐츠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저의 게으름에, 구차한 변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교회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 북미와 한국에 있는 퀴어 사람들에게 온라인 예배이지만 퀴어 사람들을 환대하는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꾸준히 알리면 그래도 알음알음 몇 명의 사람들이라도 이 예배를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다른 한편으론 이미 많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나라도 이런 교회, 이런 기독교 공동체라면 정을 떼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 같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퀴어 사람들을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전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회들로 인해 고통을 경험하고, 공동체를 떠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기로 결정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떠난 마음, 떠난 사람들을 다시 교회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불러 모은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현실로 경험했습니다.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시작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바로 그런 분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교회를 다시 찾는 것이 내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만큼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팟캐스트보다 유튜브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영상을 기반으로 하는 유튜브를 시작해 보는 것은 이미 교인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커밍아웃을 한 채로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녔던 저라도 여전히 쉽지 않고, 많이 무서운 일입니다.

저의 존재가 알려지고 특정되는 것은 그리 큰 문제도 아니고, ‘어쩌라고~’할 수 있지만, 목사 아들이면서 목사인 저로 인해 혹시라도 부모님에게 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 것이 유튜브를 시작하는 것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팟캐스트라도 시작해보자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은 벌써 몇 년째 생각만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게으름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퀴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를 올린다고 그걸 누가, 몇 명이나 들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더 정확히는, 이제 와서 그런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제 와서 그걸 여전히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미 떠날 사람이 다 떠났고, 상처받은 마음, 무너진 영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듣고 경험했을 온갖 혐오와 정죄의 언어들로 입게 된 외상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또 감추며 숨어 여전히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을 퀴어 사람들, 퀴어 그리스도인들, 그들에게 단지 몇 마디 말들이 이제 와서 무슨, 어떤 소용이 있을까요? 그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회복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용기를 북돋을 수 있을까요?

제 개인의 좌절의 경험들과 함께,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생각안에만 멈춰 있습니다.

저는 말을 잘 하는 사람도, 재미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가를 두려워하고, 실수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학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어야 계속 들을텐데, 목소리라도 좋아야 들을텐데, 얼굴도 못생겼고, 배도 나왔고, 늙었는데 같은 생각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정말로 이 퀴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기독교적 소리들이 필요할까요?

그런 거 없이 이미 잘 살고 있게 된 사람들이 많을텐데 말입니다.

떠난 사람들은 이미 그런 복음은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고,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하고 있는 소리들에 길들여져 퀴어 사람인 것이 병이나 장애가 아니며, 창조 질서에 어긋난 것도, 이성애가 아니기 때문에 더 정죄 받을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도리어 그것이 잘못된 것이며 바른 신앙과 믿음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자학을 멈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편이나 이미, 말해도 소용없는 그런 세대,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도 길을 잃었습니다. 끊임없이, ‘다 쓸모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시대에, 한국인이면서 퀴어 사람, 그런데 그리스도인이기까지 한 이들은 어떤 시간들을 살아내고 있을까요?

거기에 더해 한국인, 퀴어, 그리스도인, 목사인 저는 어떻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미국에서 신학으로 대학원에 다닐 때, 각양각색의 퀴어 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드렉퀸인 논바이너리, 레즈비언 커플, 트랜스젠더 남성, 트랜스젠더 여성이면서 레즈비언, 에이섹슈얼,,,

저와 함께 공부했던 그 친구들 모두 누구보다 진지하고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신앙인들이었고, 지금도 아무런 제약 없이 그들의 교회에 다니며, 어떤 사람들 사역을 하고, 신학으로 박사 과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퀴어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인 퀴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한국인 퀴어 그리스도인 목사인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꿈틀, 이거라도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몇 년 만에 드디어.

 

내일은 정말, 녹음을 하고,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면 정말,

 


*이 글을 쓰는데 하루와 반나절을 보내고, 다섯 번 정도 썼다 지웠다 반복했으며, 이 글을 게시한다면 다시는 이 글을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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