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 퀴어 사랑 성공기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룻기 1장 16~17절 (새번역)
지난 해 저는 성서일과에 따라 두 주간동안 룻기 본문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룻기는 퀴어 신학에서 여성들의 퀴어 서사로 읽히는 중요한 본문인데, 첫번째 룻기
설교를 하면서 저는 ‘그렇다고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퀴어 당사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과 나오미의 관계가 실제로 퀴어 관계였든지,
그렇지 않든지 관계없이 룻기는 충분히 퀴어 서사로 읽을 수 있는 본문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퀴어 관계로 설정하기를 조심스러워했던
이유는,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그리고 ‘룻은 결국 보아스와 결혼했잖아?’라는 유교 한남적
선입견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퀴어성서신학이 룻과 나오미를 퀴어 당사자로 해석하는 시도를 지극히
서구적인 관점에서 나온 발상이 아닐까 추측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상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발상을 통해 룻기를 퀴어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정도로 타협하고 정리해 설교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룻기를 다시 읽었을 때,
오히려 ‘그럴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룻은 어머니와 함께하는 것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이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동서와는 다른 선택을 하며 어머니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선택을 했고, 이 선택은
그야말로 옛 유교적 관점과 문화에서는 어떻게 보면 숭고하고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한국에서도
그럴 정도의 선택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룻기 1장
16~17절에 기록되어 있는 룻의 고백이 정말 어머니를 향한 커밍아웃과 열렬한 사랑 고백으로 읽혀졌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룻기 설교를 하면서도 밝혔습니다만 룻기를 퀴어 본문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 룻과 나오미의 관계과 실제로 여성
동성애 관계였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룻과 나오미과 레즈비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룻기에 서술되어
있는 룻과 나오미의 서사는 이미 충분히 퀴어하고 그래서 놀랍고 충만한 은혜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으며 발견할 수 있는 룻기의 퀴어함은 먼저 이
책이 남성 중심적 서사로 가득 차 있는 성서 전체에서 여성들만의 서사로 이루어진, 여성이
주인공인 책이라는 것입니다. 룻기는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놀랍고 숭고한 사랑과 강하고 담대한 여성들의 연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투신하는 선택을 한 것인데, 그 선택은 그야말로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룻은 이제 자기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땅에 가서,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종교,
언어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다와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길은 외국에서
이민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금위환향을 하는 길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갔다고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난
처절한 실패자의 귀환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를 맞이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제 ‘마라’, 괴로움이라고 부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나선 룻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은 안전하지도 않았으며,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처지와 신분이 바뀌며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연대’하며 함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룻은 이주민이며, 나오미는
실패자였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신뢰했습니다. 룻기는 사실 룻의 생존을 위해 나오미가 고군분투하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살 길을 내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는 책입니다. 나오미는 룻이 그곳에서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할 방법을 가르치고, 자기 남편의 친족들을 찾으며, 그들의 관습과 문화를 통해 룻이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편입되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나오미의 노력으로 룻은 이제 다시 유다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안전을
보장받으며,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놀랍고 아름다운 퀴어 그리고 이민자 성공담입니다.
두 여성의 신뢰와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이뤄 낼 수 있었고, 두 여성의 연대가 실패자이며
이민자인 두 사람을, 성공한 사람, 왕가의 조상이 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룻기는 퀴어한 책입니다.
그 당시 문화와 관습 아래에서는 아무도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인데, 룻은 어리석고
이상해 보이는 그래서 ‘퀴어’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 며느리와 함께 자신의 문화와 관습을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이용하고 돌파해 낸 나오미의 현명함 또한 단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닌 며느리, 함께하고 있는 사람, 이민자의 정착과 성공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동원한 과감하고 적극적인 용기이며 사랑이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여성 동성애 관계었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과 룻의 출산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퀴어 동반자들이 가족을 이루는 다양한 방법들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룻기를 읽으며 떠올릴 수 있는 그 모든
퀴어한 생각들은 본문 자체가 이미 여러 다양한 퀴어 서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합리적이고 또 온당하며 전혀 불손하지 않습니다.
룻기를 통해 우리는 사랑을,
신뢰를 그리고 깊은 연대와 그것이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성애적으로 읽히든지, 그저 신뢰와 연대로 읽히든지 관계없이 룻기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회복과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기를 통해, 더 나아가 성서를 통해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회복시키고, 성장하게 하며, 다시 꿈꾸고, 다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하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사랑이 꿈을 꿀 수 있게 하며, 사랑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살 수 있게,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듭니다.
룻기는 그런 사랑을,
그 사랑을 통한 연대를, 그 사랑이 삶을 회복시키며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퀴어 사람들이 룻기를 읽으며, 그 사랑을 발견하고,
꿈꾸고, 자기의 것으로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저도 다시 룻기를 읽으며 사랑을 꿈꾸고, 회복을 꿈꾸고, 삶을 꿈꾸겠습니다.
제가 작성했던 룻기 설교 두 편을 이 블로그에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돌들이 소리질렀던 믿음의 역사 룻기 1:8~10, 14~18 (11032024 주일예배설교)
사랑이 길을 만들고, 사랑은 결국 이긴다 룻기 3:1~5, 4:13~17 (11102024 주일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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