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길을 만들고, 사랑은 결국 이긴다 Love makes the way, Love Wins in the end 룻기 3:1~5, 4:13~17 (11102024 주일예배설교)

 지난 화요일, 저는 아주 결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바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미국 대선 개표방송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 다음날 일어나서 아침에 결과만 접했다면 괜찮았을텐데, 정말, 아주 혹시나 싶은 마음에 ABC CNN, CBS를 번갈아가며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별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저의 마음도 실시간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어느 시점까지는 해리스가 열심히 따라붙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선거인단 수는 몇 개 안 되지만 뉴 멕시코에서 해리스가 이기고 있었고, 그럴리가 없는 주인 애리조나도 해리스와 트럼프가 타이를 이루며 호각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개표가 80 퍼센트 이상 이뤄졌지만 어느 방송국도 조지아와 펜실베니아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선뜻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들도 조지아와 펜실베니아는 정말 끝까지 가봐야 알 것 같다고 계속 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조지아가 결국 트럼프 승리로 확정되자 그 때부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ABC에 출연한 민주당쪽 사람은 울먹였습니다. DC에 있는 해리스 캠프 관계자가 연단에 나와 부통령이 오늘 밤에 어떤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하지는 않은 것이지만 거기 모여 있는 지지자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있으라는 발표를 했고, 그 해리스 캠프에서 프레스가 철수하는 모습까지 보고, 저도 개표 방송을 계속 보는 것을 멈췄습니다.

사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트럼프가 다시 될 거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개표방송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해리스가 예상보다 더 크게 지고 있었고, 조지아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제 예상에도, 아 이번 선거는 총 투표에서도 질 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최종 결과도 역시나 그랬습니다. 상원과 하원도 모두 완벽하게 공화당이 승리하는 정말 전에 언제 이런 결과를 본 적이 있었나 싶게 공화당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트럼프의 재집권은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현실화되자 저는 자본주의의 무서움, 사람들의 욕망과 집착의 끝이 무엇인지 새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다른 어떤 의제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 민주당이 내세웠던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의제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에 관한 문제, 퀴어 사람들의 권리와 생존에 관한 모든 의제는 내가 더 잘 살게 해줄 수 있다는 트럼프의 구호 앞에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선거 결과를 말하고, 왜 졌는지를 분석하려고 설교의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설교를 시작하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번 선거가 완벽하게 사람들의 욕망이 모여 만들어 낸 결과였고, 자본주의의 살아있는 상징과 같은 인물인 사람을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올리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이미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언론들이 지금 한국의 저출생 문제와 젠더 갈등, 분노 범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그것을 비웃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로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던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 선거 양상과 결과, 그리고 그 정부의 내용이 딱 지금과 같았습니다.

뉴타운, 부동산 개발을 통해 더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그 호언장담에 한국인들은 이명박이라는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 한국의 민주당 또한 무능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동영 후보의 남북경협 의제는 정말로 좋은 의제였습니다. 그 사람 또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고, 제가 원하는 민주당 후보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대를 퇴보하고 역행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한국인들 역시 통일이나 인권 그것을 통한 경제 발전보다는 당장 눈 앞에 더 효과적으로 보이는 것, 당장 내 욕망을 실현해 줄 것 같은 사람에게 투표를 했고, 그렇게 이명박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그 정부의 탄생 이후에 한국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는 것보다 내 안전, 내 번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약자와 가난한 사람의 권리와 생존권을 주장하는 모든 시도가 철저히 짓밟히고 실패했습니다. 철거를 반대하던 용산의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짓밟히며 죽어가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봤습니다. 복직과 일자리를 위해 투쟁하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얻어 맞고, 끌려 가며, 처절하게 패배하는 것을 온국민이 지켜봤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역사 교육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먹고 사는 것만 잘 해결할 수 있다면 제국주의와 일제의 식민 지배도 인정할 가치가 있으며, 독재도 정당하며, 가진 사람이 더 가지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은 그들이 무능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른들은, 언론은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을, 젊을 세대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언론들도 한국 여성들의 4B 운동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한국의 여성들이 이 4가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무언의 저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한국의 여성들은 결혼이나 출산, 연애나 성관계로부터 점점 자신을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여성들이 이런 결정과 선택을 하고, 이런 흐름을 나타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부터,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한국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여성들의 자신들의 권리와 안전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잘못되었다. 페미니즘은 시끄럽고,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말하며, 남성들이 겪는 역차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 한국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전부 다 너 페미야? 이 한 마디로 귀결되며, 여성들의 입을 막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당조차 거기에 동조하며 여성들의 자신의 안전에 대해 말하는 것,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꺼려하며, 잘못되고 이기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안전에 대해 외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대가 만들어졌습니다. 민주당 안에서조차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너 페미야? 하고 말하며 조심스러워하고, 지금은 그런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그런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집권을 하지 못했다, 그런 건 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여성들의 입을 막아버렸고, 누구도 자신들의 편이 되지 않고 있다 여길 때, 여성들은 결국 입을 닫고,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출산을 하지 않는 것으로 자기를 방어하며 연애하지 않고, 섹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민주당에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장애인들이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들의 교통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시위를 이어갈 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민주당은 단 한 번도 그들과 함께한 적이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에 대한 재판이 얼마전에 끝났고, 당시 경찰 책임자나 구청장 그 누구도 법적으로 합당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법부는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이재명 대표는 바로 얼마 전 한국 교회 대표라는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또 차별금지법이나 동성혼 법제화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고 있다는 발언을 공식적으로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주식에 투자한 것에 물리는 세금을 없애는 것을 당론으로 결정했으며, 민주당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진보적인 의제도 대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한 줄 요약하면, 결국, 어른 세대의 무능입니다. 소위 진보적인, 국민의 힘과 수구를 대표하는 구세력의 대척점에 있다는 민주와 진보를 대변하는 이들조차 무능했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고, 그들만의 잘난 대의라는 구실과 명분 아래 여성과 장애인, 퀴어와 가난한 사람, 노동자의 목소리는 전부 파묻히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고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할 때마다 저는 코웃음을 칩니다. 그 위기를 누가 만들었는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반대에는 200만명이 모이자고 외치면서, 대형교회의 부자 세습이나, 목회자의 성 추문에 대해서는 왜 회개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 그 때는 왜 모이자는 말을 하지 않는가?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려는 목회자들을 왜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단에서 내쫓고 그들의 편에 서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는 것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에도 교회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그 어느 곳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의 어른 세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연금이 축소될 것이고, 의료보험 보장이 축소되거나 민영화될 것입니다. 그나마 존재하던 사회 안전망이 무너질 것이고, 디지털화 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마땅히 누릴 수 있어야 할 권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식당과 카페, 병원을 방문하는 것,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어 키오스크 주문으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직접 주문을 받고, 예약을 하지 않아도 진료를 볼 수 있어야 함에도 그것이 마땅한 권리임에도, 사회는 점점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도태되어야 할 것은 도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시끄럽고, 교통을 방해하며,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갈취하고 현혹하는, 그러면서 세금은 내지 않는 집단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듫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현실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시점에 룻기를 읽는 것이 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는 세상이 무너져 내려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돈 많은 사람, 성공한 사람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은 명성과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성서에게도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이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소용,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룻기를 통해 이런 시대를 살아내야 할 때,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를 작은 지혜와 깨달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을 향해 다른 남성인 보아스의 집을 찾아가서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그의 발 밑이 누우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본문은 지금 이 시대의 관점에서도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향해 다른 남성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지금 관점으로도, 그 때의 시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위험하며,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자기 아들이 이미 죽었다고 하더라도, 며느리를 향해 다른 남성의 집에 가서 밤을 함께 보내고 오라고 하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오미의 시대에, 이것은 여성들이었던 나오미와 룻이 계속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어떤 남성도 없는 두 과부가 그러나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남편의 집안 사람들이 자기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려면 직접 이런 행동을 뭐라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면 더 위험하고,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그 정도가 아니어도 사회에서 아예 매장 당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아들과는 관계없이 살아있는 자기의 며느리, 자신을 따라 먼 이방의 땅까지 함께 온, 자기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 며느리를 자기 남편의 집안 어른에게 보냅니다. 강간과 불륜을 허용하는 것이 아닌, 집안 사람들을 향해 자기들을 책임지라는 과감한 시위였으며, 용감한 여성들의 연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읽은 룻기 4장의 본문처럼, 결국 그 연대는 성공했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고, 아들을 낳았으며, 그로 인해 룻과 나오미는 다시 그들의 집안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을 보장받고,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나오미라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 자신의 체면과 상관없이 다음 세대를 염려하는 어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며느리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룻은 나오미의 말을 따르며, 그리고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며 끝까지 변함없는 의리와 사랑,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연대는 결국 새로운 생명을, 안전과 번영이라는 결과를 얻게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결국 사랑은, 결국 서로 함께하는 것은, 연대는, 희망이 되고, 기적이 되며, 모두가 함께 회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룻기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며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런 시대에도 룻기를 읽으며, 이 지혜를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만 챙기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와 약자와 소수자 이방인을 향한 배려와 관심을 놓지 않는 것, 결국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 룻기가 말하고 있는 보여주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한 이 지혜를 모두 기억하며 함께 살아 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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