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이 소리질렀던 믿음의 역사 A History of Faith That Made the Stones Shout Out 룻기 1:8~10, 14~18 (11032024 주일예배설교)
지금 이 시기에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드라마는 ‘정년이’입니다. 이 드라마는 해방 후 1950년대부터 TV 방송이 대중화되던 시기인 1960년대 그 사이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Hulu와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말을 전하고 있는 저도 아직 이 드라마를 보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이나 장면까지 다 알지 못하고, 아직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뜨는 몇몇 장면들만 따로 본 정도이지만, 드라마가 실제로 방영되고 인기가 높아지면서 저도 이 드라마에 대한 것들을 찾아보고 또 영상들을 찾아보면서 점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화제가 되었을 때,
제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 드라마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지점이었습니다.
저도 이 드라마 이전까지 여성국극에 대해서는 얼핏 어디서 들어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드라마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보니 실제로 흥미로운 것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중심 소재가 되는 여성국극은 실제로
TV 방송이 인기와 관심을 모으기 이전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놀랍고 흥미로웠던 것은 그렇게 잔혹하고, 악독한,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고, 역사를 지우려 하며, 그야말로
‘황국신민화’ 시키려했던 일제 시대를 지나서도 우리 소리,
국악은 끝내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 소리를 계속
찾고 듣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놀라웠던 것은 그런 우리 소리가 인기를 모으고,
사람들이 계속 찾게 하는 중심에 ‘여성국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성국극은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요소가 많은데, 국극이라는 것은, 국악으로 된 극, 즉,
한 사람의 명창이 심청가, 흥부가, 춘향가를
다 혼자 소리로 묘사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여러 사람이 나눠서 극으로 만들고 소리도 나눠 부르는,
그야말로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개념의 국악으로 된 연극을 말하는 것으로, 남녀가
같이 각각의 배역을 맡아 극을 진행하는 것을 ‘창극’이라고 부르며,
이 창극은 지금까지도 국립 창극단이 따로 있어서 정기적으로 공연이 이뤄지고 있을 정도로 이제는 국악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 국극은 이 창극 속의 모든 배역들을 그야말로
모두 여성들만 나눠서 맡아 공연을 했던 것으로, 이도령이나 방자, 흥부나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 같은 역할도 모두 여성이 남성 분장을 하고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1950년대에 이미 젠더 크로스, 크로스 드레싱을
한 공연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벌여졌고, 사회의 호응을 얻으며, 크게
부흥을 했다는 것이지요. 여성 국극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서 했던 여성 배우는 실제로도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팬레터가 쏟아지고, 그 중 한 여성 팬은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를 찾아서 결혼 사진을
찍어 남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으로 드라마에서도 묘사가 되었다고 하니 나중에
드라마를 보실 분들은 기억하면서 보시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국극이 시작된 동기 또한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도 굉장히 용감하고
인상적인데,
해방 후 만들어진 국립국악원 안에서 여성 명창들이 남성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창극에서도 주요 배역에서 소외되거나 차별을
받자 그런 대우에 맞서 남자들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자신들만의 극단을 만들고 공연하기 시작했던 것이었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성국극이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고,
TV가 등장한 이후로 여러 이유들로 그 인기가 잦아들었지만, 지금도 국립창극단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엄엄히 우리 역사의 한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오래 드라마와 여성국극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온 이유는 이런 내용들이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살펴볼 룻기와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한 달 동안은 우리가 욥기를 함께 읽으며 설교를 하고 또 묵상했는데, 성서일과에 따라 이번
달에는 룻기를 살펴보게 될 것 같습니다.
룻기는 성서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와 더불어 여성의 이름이 책의 제목이 되어 있는 점,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부터 특별하고, 그런 면에서 앞에 계속 얘기하고 설명한 여성국극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퀴어 신학에서는 룻기의 두 주인공인 룻과 나오미 이야기를 퀴어 서사로 해석하고, 더 나아가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퀴어한 사이,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 관계로 해석하는 관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룻과 나오미를 퀴어 당사자로,
여성 동성애자들로 해석하는 건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도 아주 보수적인 사람인데, 그렇기 때문에, 룻과 나오미를
퀴어 여성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됩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인터섹스, 즉 두 성별이 모두 존재하는 간성인으로 보거나
논 바이너리 혹은 트랜스젠더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충분히 있습니다. 또 복음서에 등장하는 한낱
몸종을 살리고 싶어서 먼 길을 달려와 예수를 모셔 가려고 하는 로마인 백부장 군인의 이야기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싶은 근거와 단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룻과 나오미의 관계와 서사를 퀴어 동반자 관계와 퀴어
서사로 해석할 수 있을까? 라고 한다면 저는 오히려 조금 조심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룻은 나중에 보아스라는 남성과 다시 결혼을 하고 출산까지 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까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오히려 제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러웠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틀림없이 저
또한 퀴어 사람이지만, 동시에 남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
서서와 여성간의 관계와 역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았습니다. 이 사람들, 즉,
처음으로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퀴어 동반자 관계, 퀴어 서사로 해석한 사람들은 왜?
무엇을 근거로 그런 해석을 했던 것일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와중에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데,
아~ 혹시 이걸 퀴어 서사로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들이 백인, 서양인들이어서 그랬던 걸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룻과 나오미의 관계와 서사를 설명하는데 단서가 되는 중요한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룻기
1장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각각 다른 선택을 하며 헤어지고 또 함께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 대한 아시안, 즉, 이 성서를 기록한
히브리인들과 또 비슷한 가족 관계,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관점과 미국인들, 유럽 신학자들의 관점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방 땅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고, 또 그들의 대를 이을 아들과 손자가 없는 상황에서
덩그러니 남게 된 세 여성 사이에 어른인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를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에게 각각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하게 되고, 두 며느리 중 한 명인 오르바는 그런 시어머니의 말에 응답해서 돌아가기로 선택합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결코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 중 다른 한 명이자 성서의 주인공인 룻은 끝까지 자신의 시어머니와 함께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지점에서, 서양인의 관점과 한국인의 이해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인 신학자들과 독자들에게 이 장면은 정말로 ‘사랑’이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동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룻이 하고 있는 말을 보십시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자신의 영역과 바운더리가 분명한 서양인,
백인의 시각에서 룻의 이런 말은 정말 사랑하고 있는 연인 사이가 아니면 할 수 없을법한 고백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반면에 대가족 중심, 개인보다 가족을, 대를
잇는 것을 중요시하는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의 정서에서는, 음, 정말
굉장히 어렵고 힘든 결정이지만, 당연하고, 마땅하며, 있을 법한 일이지…하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룻의 처지가 안되었고, 딱하긴 하지만 그럴 수 있고, 그럴 법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 배경에서,
룻과 나오미의 서사가 백인 여성 신학자들에게 레즈비언 서사로 읽히고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살짝 스쳤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석하고 수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성서를 잘못 읽은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신학과 신앙의 갈림길이 존재합니다. 이 설교를 하면서 설교자인 저의 생각은,
아닙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해도 됩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됩니다.
한국 교회는 그렇게 읽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경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해석을 통해 그 해석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났고, 중요한 도전과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래서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며 위로를, 진리를 경험하게 되었다면 그 해석은 충분히 가치 있고, 충분히 옳은 것입니다.
룻기를 시작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이 룻기가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깊은 연관이 있고,
연결고리가 존재하며, 중요한 교훈과 깨달음을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잃고 혼자가 된 나오미와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룻,
이 두 여성의 배경은 우리 교회가, 한 목사님께서 하고 계시는 싱글맘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여성과 남편을 잃은 여성은 이 성서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대에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시대 배경에서,
이들은 가난에 처할 수밖에 없고, 사회 공동체의 인정을 받지 못하며,
안전을 위협받는 존재들입니다. 성서 시대의 룻의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에 가난하며,
사회의 안정망에서 소외되기 쉬운, 안전을 위협받고 있는 싱글맘 여성들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게다가 룻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그 당시 그 어떤 국가와 민족 공동체들보다 더 다른 민족, 이방인, 이민자들에게 배타적이었던 이스라엘 공동체, 히브리
공동체에서 살게 된 존재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신분이 보장되지 않고, 그래서 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서류미비자, 이민자들의 삶을 룻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룻과 나오미는 그런 가운데 자신들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스스로 자기들의 길과 방법을 찾아야 하는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로 오게 되었을 때,
그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들의 가족의 남자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들을 외면했고, 자기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그들을 다시 그들의 가족에 편입시켜 그들을 보호해야 했음에도, 그 가문에 속해 있는 남성 구성원들은 죽은
그들의 남편, 아들이 모두 자신의 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들을
받아들이기보다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습을 보였고, 서로 기업 무를 자, 고엘의 책임을 떠넘겼으며, 그 사이에 룻과 나오미는 자신들의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는 박목사님께서 한국에서 하셨던 사역과 지금도 마음과 관심을 두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룻기의 결론이,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포용, 구원, 그리고 그 이방인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또한 누군가에게는 이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로, 퀴어 여성들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지점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룻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환대와 그것을 통한 구원, 그리고 회복과 번영입니다. 룻기는 당시 사회에서는 지워지고 잊힐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이야기를
보존하고 그 여성을 주인공으로 빛나게 하는 책입니다. 룻기는 환대와 수용,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 환대를 경험하고, 회복과 구원을 얻는 것을, 더 나아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룻기를 통해 우리는 율법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이며, 성서가 정말로 가르치고 전하며 보존하고 알리려고 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룻기를 읽으며 우리는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고, 보존하며, 함께하시는,
그들을 그들의 존재 그대로 인정하며 사랑해 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깨달으며, 그 진리를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룻기를 계속 읽는 동안 우리가 그 깨달음과 진리 안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또 우리 교회의 뱡항을 찾고, 행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정년이’라는 드라마 이야기를 했는데, 설교를 마치는 이
시점에, 한국에서 퀴어 남성, 게이 공동체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또
다른 드라마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같은 제목, 같은 원작을
가지고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한 달 간격으로 개봉과 공개가 된 작품이 있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한국에서 20대 남성 동성애자의 삶을 여러 모양새로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드라마로 공개되려고 할 때, 한국교회는 이 드라마가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비난하며 그래서 한동안 이 드라마의 예고편이 삭제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보에도
알려드린 것처럼, 바로 지난 주일, 한국에서는 한국 교회 전체가 모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집회를 주일에 개최하며 자신들의 세를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들은 사실 너무 터무니없고 무의미합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 죄 없는 그들의 존재가 지우려고 한다고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년이와 여성국극 시대의 여성과 국악의 존재가 그러했고, 남성 중심의 사회와 신앙 공동체 사이에 잊히지 않고 보존되며 오히려 역사의 한 축이 될 수 있었던 룻의 존재,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성서는 이렇듯,
아무것도 아닌 존재, 룻과 나오미의 믿음의 이야기를 역사로 전하며 그들이 믿음으로
소리쳤던 기록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믿음으로 배우고, 존중하며, 따르고, 함께해야 할 돌들이 소리친 믿음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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