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use He Lives 요한복음 10장 24-31, 11장 7-8, 16-17, 25-27절 032226 로뎀나무그늘교회 설교
우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같이 목격했거나, 함께 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와 무게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어제 광화문에서 BTS 콘서트가 있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거기 그 자리에 찾아가 함께하는 것이 일생 일대의 경험이었던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안 그래도 복잡한 서울의 주말 교통 체증을 가중시키고 소음을 유발한 시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BTS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BTS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래서 BTS가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 1장 9~12절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 빛’은 물론 BTS는 아닙니다. 요한에 의하면, 이 빛은 세상을 창조한 존재이며, 그런 그가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용케, 이 빛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빛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빛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는 계속해서, 틈이 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5절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7~9절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요한복음 10장 11절
세상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사역을 하시며,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예수는 기적을 보여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하며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했지만, 예수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도무지 예수를 믿거나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찾아와 또다시 예수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위협합니다. 제 생각에 요한복음 10장의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정말 이를 앙 다물고 화를 참으며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기적도 보여 줬잖아! 귀신도 내쫓고, 너희는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방법과 실천으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줬잖아! 그런데도 부족해? 아직도 뭐가 더 필요해?’ 하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오늘 11장을 다 읽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결국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광경을 본 사람들 중에는 나사로의 가족과 예수의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사로 가족에게 조문 온 사람들, 예수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니까 그를 감시하고 비난하기 위해 쫓아온 유대인들, 그냥 구경하러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무덤에서 이미 시체가 썩어가고 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그를 감고 있는 천 그대로 일어서서 걸어 나오는 것을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인정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광경을
보았어도, 그것마저 도리어 예수를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하게 하는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를 인정하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예수가 행한
일을 고해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다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활의 기쁨이며 감격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소망과 믿음이 되었던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더 괴기스럽고, 싫고, 무섭고,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나 저러나 나는 신기한 구경을 하긴 했지만, 이건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하고 구경꾼으로 남은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모두가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했어도, 그 부활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모두가 예수가 부활하셨음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 부활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예수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라면, 그 사람은 이 예수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고대하고 기대하기에 앞서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는 어떤 의미인가?
저는 연초에 오늘 설교를 하는 것이 결정된 다음 바로 이번 주일 성서일과 본문이 무엇인지를 확인했는데, 그런 다음 정말 순식간에 무의식적으로 욕을 했습니다. ‘ㅆㅂ…다른 날로 다시 바꿔 달라고 할까?’ 성서일과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성서 본문을 A, B, C 3개 파트로 나눠서 3년 주기로 한 번씩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는데, 그래서 제가 찾아보니까 오늘 본문을 가지고, 2020년 3월 29일에 한 번, 2023년 3월 26일에 한 번 이렇게 벌써 두 번이나 설교를 했더라고요. 그런데 이미 그때마다 이번과 똑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하지 말까? 이번 주만 성서일과 말고 다른 본문을 정해서 설교할까?’
저는 이 본문이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으로 설교를 정말 기깔나게 하고 싶은데, 과장하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그 자리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나 마르다, 마리아처럼 내가 봤다고, 내가 경험했다고, 자랑하면서 설명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저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예수 잘 믿었더니 예수가 나에게 이런 엄청난 일을 해줬다! 뭐 그런 얘기가 있어야 얘기를 해도 뭐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믿어 보니까 예수님 정말 살아 계시더라. 예수가 나사로를 정말 부활시킨 거 맞다. 나도 경험했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예수 잘 믿으면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설교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2020년에 설교를 할 때도, 2023년에 설교를 할 때도, 제 삶 가운데 어떤 대단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망하고, 더 실패하고, 더 어렵고, 더 앞이 보이지 않기만 했는데, 그런 와중에 이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내 삶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내가 이 영광을 보지 못했는데, 이 말씀을 자랑삼아 전할 수 있는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해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며? 그래서 나사로도 짜잔하고 살려 줬으면, 나도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이렇게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데 나는 왜 안 보여 줘요! 나도 보여줘요 그 영광! 그랬지만,
6년 전에도, 3년 전에도, 지금도 어떤 막 특별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이 정말 자신 없고, 싫었습니다.
아직도 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계속 믿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수를 믿어서 내가 좀 이득을 본 것이 있는가? 아주 없진 않았겠죠. 그래도 뭐가 있긴 있었겠죠.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예수 믿어서 손해 본 것,
인생 약간 망한 듯한 것? 그런 것만 계속 많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 퀴어 사람들을 저주하고 혐오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말이나 막 내뱉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트위터에서 기독교인들 저주하고, 화 내고,
교회 아무 소용없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일 나쁘다고 말하는 분들 심정이 정말
백 분 이해되고 동의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어서 내가 잘 되고, 부활의 영광을 보고, 복을 받는 것, 만사 형통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 전부라면, 굳이 지금은 그것 때문에 예수 믿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에게도
물어봤습니다. 나 예수 왜 계속 믿지? 교회 왜 계속 다니지?
예수가 나에게 어떤 의미지?
그런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기적이나, 예수의 인도하심이나, 예수의 놀라운 능력을 매번 매 순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예수의 말씀이 나를 그래도 이만큼 사람 되게 했던 것, 예수의 말씀이 내가 조금
더, 하루 더 살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 요만큼 견딜 수
있는 소망과 우리가 되었던 것, 그래서 아, 내가 기도해서 어떤 큰
것을 얻어 봤던 것이 언제였나 딱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 말씀이 나를 바꾸고, 나를 책망하고, 그래서 나를 자라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견딜 수 있게 했고, 위로가 되었던 것은 기억해~ 예수는 꼭 어떤 큰 기적이 아니어도, 여전히 나에게 영향력이 있고, 여전히 내 삶에 의미가 있는 존재야. 그러면, 그래도
이 예수와 계속 함께 가 볼까?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이것들을 포기하지 말아 볼까? 다시 결심하고 결정할 근거가 되었습니다. 저도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그 영광을,
언제나 정말 볼 수 있을지, 살아 있는 동안 볼 수는 있는 것인지…그건 확신이 안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보면, 사실 예수의 기적이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 주고, 자기 병을 고쳐
주고, 자기에게 권력이나 명성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적도 있고, 물고기 좀 더 잡히게 해줬던 적 몇 번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 때 그 옆에서 같이 빵이랑 물고기랑 배부르게 얻어먹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 살림살이가 나아졌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예수를 믿고 따르고 전했던 것
때문에 쫓기고, 도망다니고 그러다 결국 죽게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남 잘 되게 해준 적은 있어도 자기들이 잘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없어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위해 끝까지 자기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예수가 정말로 의미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과 가르침이 그들 자신의 삶을 바꿨고, 사람들의 삶을 바꿨으며, 예수를 따르고 함께했을 때 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자신들의 삶에 의미와 목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했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신기한 구경을 한 구경꾼으로 끝이 났고, 어떤 사람은 고발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끝까지 남아서 그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 부활을 품고, 정말로 죽기까지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포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도 동일하게 예수의 말과 가르침이, 복음서와 신약성경, 히브리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래도 제 삶의 방향이 되고, 목적이 되고, 힘이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11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설교를 하면서도 계속 함께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사람들을
향해 벌써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누구도 예수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고, 다 그저 증거를 더 보여달라고, 내가 믿을 수 있게, 납득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의 삶에 정말로 의미가 있었고, 예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던 마르다는 예수가 자신을 향해 이 질문을 했을 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며 이것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마르다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동생이 일은 안하고 예수님하고 얘기하며 놀기만 하려고 하자, 바로 예수에게 그것을 따져 물으며, 쟤도 일 시키라고 말하기도 했고, 이 11장에서도 예수가 뒤늦게 자신들을 찾아오자 대뜸, 예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우리 오빠 안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에게 예수는 정말로 의미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 가족들은 예수의 사랑을 몸소 경험했던 사람들이고, 그래서 예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 질문하셨을 때, 그 예수의 말을 비웃고, 분노하며 도리어 죽여 없애려고 했던 유대인들과 달리, 정말 즉각적으로,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질문은 예수가 나를
향해, 우리를 향해
하고
계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예수를 향해 무엇을 해 주시기를
바라고 구하며 있다가 결국 내 소원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회의감에 빠져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고작 예수에게
기대하는 것이 딱 그 정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나에게 딱 그 정도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는 그냥 내게 자판기 같은 존재, 요술 램프 속 지나 같은 존재 정도여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 내고, 삐지고,
그래서 교회도 안 나오고, 신앙을 포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의 가르침이,
예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예수의 죽음은 여러분에게
어떤 사건입니까? 예수가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예수의
말씀과 삶과 죽음의 무게와 깊이를 온전히 헤아리고 굳은 믿음 가운데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떤 기적, 어떤 능력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기대할 때, 그 기대에 앞에서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이신지 먼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 그래서 그 부활이
그들에게 소망이 되고,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그들 또한 (예수로 인해)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 예수의 죽음이 모두,
먼저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저의 삶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질문하며 또 도전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이십니까?
사순절입니다. 사순절 뭘까? 생각해보면, 부활의 영광을 다시 되새기고, 그것을 고대하며 기대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예수의 삶과 죽음과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말씀들의 원래 뜻은 무엇이었는데, 예수의 의미를 먼저 되새기고, 돌아보고, 반성하고, 앞으로 나가기로 결정해보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예수의 의미와 무게를 헤아리고 나면, 바로 그 때 맞이하게 되는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의 소망이 되고, 그래서 나의 능력이 되며,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희미하게라도 경험하고 맛보게 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질 때도, 어떤 이벤트나
특별한 순간이나 사건이나 경험이 매일, 매 순간 반복되진 않습니다.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어떤 강렬한 이벤트나, 좋은 선물이 아니라, 서로 더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 그래서 상대방이
어떤 상태나 모습이든지, 조금 더 견뎌보기로 결정하는 것, 함께하기로
결정하는 것, 그것이 결국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내 삶을 인도하고 있다면, 그 말씀들이
내 삶의 기준과 방향이 되고 있고, 그래서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더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고 변화되는
경험을 해봤다면, 우리는 매번 우리가 기대했던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이뤄지지 않고, 마치 하늘이 막혀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더라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여전히 내 삶을 인도하고 있고,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 그저 어떤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나를 대신했던 죽음, 내
죄의 값을 치르고 지불하기 위한 죽음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은혜가 되어,
그것이 지도가 되고, 표상이 되어, 우리의
삶에서 의로움을 지키며 살아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예수를 믿는다는 어떤 사람들의 행태나 말과 판단이
우리 속을 뒤집어 놓고 실망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 때마다 예수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예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 예수의 죽음이 내게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아주 조금 더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약간의 소망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3년이 지나면 또 이 본문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저는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전하고 있을까요? 그때까지 목사를 하고 있을지,
사실 그것조차 지금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도 여전히 목사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때도 여전히 예수를 믿고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이 제 삶의 기준이 되었고, 예수의 죽음이 제 신념이 되었고, 예수의 부활이 제게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지금도, 아마 그때도 여전히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말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른 찬양 그대로 그 부활이 여러분에게 내일이 되며, 두려움을 내쫓는 힘이 되고,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경험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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