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장: 아브라함의 하나님, 엘리에셀의 하나님, 라이언의 하나님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훼여! 오늘 일이 모두 뜻대로 잘되게 해주십시오. 하느님의 심복 아브라함에게 신의를 지켜주십시오.” 창세기 2412(공동번역)

전통적으로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창세기 15장에서 아직 자식이 없는 처지였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속자-새번역/새한글에서는 상속받을 자식으로 번역-라고 소개했던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과 동일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엘리에셀의 존재가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창세기 15장과 24장 이 두 곳의 언급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그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은 이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집 모든 소유를 맡아보는존재라고 표현하고 있고, 앞서 말했듯 아브라함은 이 종을 자신의 상속자로 여길만큼 이 종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부터 24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모든 서사와 삶 가운데 이 종, 엘리에셀이 함께하고 있었고, 24장은 아브라함이 늙은 것처럼 엘리에셀도 늙은존재로, , 두 사람이 인생의 전반을 함께 동행한 존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가문의 유산과 주도권을 이제 아들에게 넘기려는 시점에서, 그 승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인 아들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그 아들의 신부가 될 사람을 찾는 과업을 이 늙은 종에게 맡기려는 것 또한 아브라함이 이 종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다리 사이에-사타구니, 더 정확히는 성기에 대고-맹세를 하게끔 하는 모습은 물론 그것이 당시 고대 근동에서 행해진 아주 보편적인 맹세 방법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섹슈얼한 것으로, 퀴어 관계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할 수 없지만,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그런 방식의 맹세 장면이 일면 섹슈얼하게 읽힐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글을 더 진행하기 전에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저는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의 관계를 퀴어 관계였다고 해석하며 그것에 대한 글을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열한 여러 정황들은 엘리에셀이 아브라함과 그의 집안에서 상장히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이 퀴어 연인 관계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명확한 것은 이 엘리에셀이라는 존재가 아브라함의 전 생애에 걸쳐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었고, 아브라함 또한 그를 자신을 이을 상속자로 여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에서 더 논의하고 싶은 엘리에셀의 정체성은 그가 다마스쿠스 녀석,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평생을 함께해 온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전에 이집트 출신이었던 하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지만, 하갈에 대한 글에서는 그의 이방인 정체성보다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그의 삶과 결단에 대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글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아브라함과 함께했던 이방인존재로서 엘리에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 가문의 일족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번 더 먼저 짚고 넘어가면, 이 글은 이방인엘리에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지만, 그 이방인이 어떻게 아브라함 가문과 함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나아가 율법이 말하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포용 정신 이런 것을 언급하고자 하는 글 또한 아닙니다.

제가 이 글에서 이방인으로서 엘리에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글이에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브라함 가문과 함께하고 있던 타자로서 엘리에셀이 어떻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목격하고 경험해 왔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조금 더 자료를 찾아봐야 하겠지만,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그가 어릴 적에 사용하던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히브리 성서에는 여러 명의 엘리에셀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모세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엘리에셀이었고, 역사서와 예언서 여러 곳에서도 각각의 시대에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 이름은 유대인들이 흔하게 사용하던 이름으로 다메섹 출신의 이방인이 사용했을 법한 이름은 아닐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바꾸게 된 경험이 있고( 17), 또 그렇게 이름을 바꾸게 되었을 때,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17), 아브라함의 종이었던 엘리에셀 또한 충분히 자기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과 동시에 할례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출애굽기 18 4절에는 모세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엘리에셀이라고 지으며, 그 이름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은 돕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상속자, 아브라함 가문의 대표자가 될 뻔한 이 이방인의 이름은 다름 아닌 나의 하나님, ,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를 돕는 분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전승과 자료, 퀴어성서주석에 따르면,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떠날 때도 아브라함과 함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삭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삭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끄셨는지 아브라함 가문의 성장과 번영, 이삭을매개로 아브라함이 받게 된 시험의 과정과 그 내용,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엘레에셀이 이제 자신의 주인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명령에 따라, 그 주인의 아들의 신부가 될 사람, , 가문을 잇고 계승할 후계자를 낳고 양육할 사람을 찾기 위해, 주인 없이, 홀로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4장은 그런 그의 여정에 대한 기록으로, 이방인인 그가, 자기 주인이 믿고 있는 신, 자기 주인의 하나님, 자기 이름을 있게 한 존재에 대해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글의 서두에 옮겨 놓은 것처럼, 주인의 고향에 도착한 종은 자기 주인의 하나님께 자신의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임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창세기의 이전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이 종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될지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정황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정말로 그 내용 그대로 행동하고 이루게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먼 여정의 끝에 우물 곁에 도착해 쉬면서 그에게 물을 주고,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주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로 한 여성이 나타나 그가 물을 달라고 하자 물을 주고, 먼저 자신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내용들이 있고, 그래서 마침내 이 종은 자신에게 물을 줬던 여성, 아브라함의 혈족인 리브가와 함께 돌아와 이삭의 아내가 될 수 있게 하지만, 저의 초점은 그가 임무를 잘 완수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다 부연하고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이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여정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되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목격자입니다. 그는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아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그리고 롯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어떤 교류를 했는지,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의 가문을 형성하고, 부를 축적하게 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든 것을 아브라함 곁에서 지켜보고, 아브라함과 함께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그런 주인의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홀로 여정에 나서게 되었고, 그 여정에서 주인 없이 자신 홀로, 단독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인이 기도한대로, 주인을 통해, 주인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이뤄 온 것들을 옆에서 보고, 듣고, 관리해 왔는데, 이제는 그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 그 주인의 하나남을 찾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는, 직접, 기도해본 적이 없는데, 자신은 아브라함 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이방인 출신인데, 그런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고, 아브라함을 통하지 않고 직접 기도해도,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 또한 들어 주실까? 아브라함과 함께하신 것처럼, 나도 함께 해주실까? 마음을 졸이며,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해달라며, 그런 마음으로, 그래서 어쩌면 더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그런 엘리에셀의 상황과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구체적인 기도가 하나하나 정말로 세세하게 다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인 자신이 했던 기도 또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엘레에셀은 자신의 이름의 의미가 단순히 아브라함의 하나님깨서 아브라함을 도우셨다는 것이 아닌, ‘의 하나님이 도 도와준다는 것이었음을 체감했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긴 글을 여기까지 이어 왔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의 개방성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 히브리 사람,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히브리 성서조차 히브리 사람들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들이라도 그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 소외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여러 이야기를 통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여러 이방인들의 사례는 모두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없이 그를 하나님의 일족으로 편입시켜 주시고 구원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라합의 이야기가 그러했고, 룻의 이야기가 그랬으며, 율법이 그것을 명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 이방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 또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많은 존재들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있는 교회들로 인해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많은 존재들에게, 성서가 말하고 있는 진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심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여러 개인적인 상황들로 인해 고민하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장례지도사로 전직에 대한 고민과, 그럴 경우 아예 영영 목사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그 와중에도 장례지도사로 취업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경험하며, 월세 지급과 카드 값을 걱정하면서, 그게 아님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퀴어인 그대로 존재하려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셔서 그러는 것일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만 그런가요?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저처럼 아주 오래,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가르침에 길들여져 계신 퀴어 분들이 고통과 어려움을 마주하게 될 때면 어쩌면 같은 생각과 죄책감으로 더 혼란스럽고 힘들게 된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끝없는 자기 연민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제가 선택한 것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게 아니라고 알려주는 성서의 말씀들을 찾아 읽고, 해석하며, 되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런 작업의 일환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생각들, 그런 상황들은 계속되고 반복되겠지만, 그 때마다 저는 제가 알고 배운 성서의 가르침 그대로, 진리 그대로,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되새기며, 또 믿으며, 하나님 신뢰하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엘리에셀이 기도했고, 또 그 기도한 것이 내용 그대로 아주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처럼, 저도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저의 확신, 저의 간증과 믿음의 근거로 남게 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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