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전하는 부활절 이야기: "퀴어에게 평화가 있기를!"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교회력에서 부활절 이후 오순절이 되기 전까지 기간은 모두 부활절 시기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셀 때도 부활절 이후 몇째 주일, 이런 식으로 표기를 하고, 지금 우리는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부활절과 그 다음 주일, 그러니까 지난 주일까지 저는 공교롭게도 2주 동안 같은 본문으로 다른 두 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근래에 자의 반 타의 반 주일마다 다른 교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두 주일 동안 서로 다른 교회에서 같은 본문으로 두 번의 설교를 듣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20 24절부터 31절까지였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와 자기 손을 만져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예수 자신이 틀림없이 부활했다는 것을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성서일과에 따라 올해 부활주일 본문으로 지정되어 있는 말씀이 요한복음의 이 부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두 주간에 걸쳐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듣게 되자, 이 본문에 대해 저도 나름의 묵상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어 좋은 점도 있지만, 언제 다시 설교를 하게 될까 생각해 보면 저도 그걸 장담할 수 없어 약간 씁쓸합니다. 그래서 생긴 약간의 습관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이 본문을 나라면 어떻게 설교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요한복음 설교를 2주 동안 들으면서 제가 하게 된 묵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를 찾아오신 이 요한복음 본문은 신약성서에 있는 4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요한(공동체)의 특수 자료입니다. 요한복음은 원래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다른 세 복음서와 비교했을 때 요한복음만의 두드러진 특징과 자료가 많은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다른 세 복음서와 기록된 시기부터 확연한 차이가 나고, 구성이나 전개도 다릅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공통의 관점을 가지고 비슷한 구조로 복음서가 전개되며,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기초로 마태와 누가가 각각 자신들의 특수자료를 조금 더하거나 뺀 정도라면, 요한복음은 구성과 전개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종의 로드무비 같은 구성을 하고 있어서, 예수가 자신의 공생애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이 한 번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여러 번 가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예수의 공생애가 어떻게 시작하고 전개되는지를 서술하는 연대기적 방식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존재이며, 세상에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정리하고 소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그 소개와 정리의 핵심은 바로 '관계'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와 세상과의 관계, 예수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정리하며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관계맺음'이 도드라지게 묘사되어 있고,  다른 세 공관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예수는 왕이며, 구원자, 선생님이신 하나님이기에 권위와 위엄이 있고, 절대적이며, 가르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면, 요한복음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먼저 찾아가시는 하나님, 기다리시는 하나님,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친밀함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 1 11-12 (새번역)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그가 누구든지, 자기를 맞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복음서 내내 자기를 맞아들이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자신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 권력자들, 부자들이 아니라 이방인들, 장애인, 여성, 몸과 마음, 정신이 아프고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어부, 일용직 노동자인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자기 제자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은 피해서 가는 지역인 사마리아에 가셔서 한 여성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는 나사로를 찾아가 그를 살려주셨고, 부활절 본문인 요한복음 20장의 기록처럼 부활하신 직후 이미 다른 제자들을 만나셨음에도, 부러 도마가 함께 있을 때 다시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퀴어성서주석은 역시 요한복음에만 수록되어 있는 요한의 특수자료인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를 커밍아웃 스토리로 해석합니다. 예수는 죽어서 꽁꽁 싸매진 채로 동굴 속에 가둬진 나사로를 찾아가 그를 부르고, 동굴 밖으로 꺼내 빛을 보게 하신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꽁꽁 싸매진 그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생명을 얻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와 결박을 풀고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이 나사로의 모습은 은둔하며 벽장 속에 있던 퀴어 사람들을 그들의 정체성이 죽음이 아닌 삶이며 생명이라고 선언하시고 그들의 결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시는 해방의 예수를 볼 수 있게 만듭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를 찾아와 도마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며 믿는 자가 되라고 초대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또 하나의 커밍아웃 스토리로 해석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 또한 죽음이라는 벽장과 어둠을 뚫고 나온 예수의 커밍아웃 사건입니다.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이 당연한 듯이 여겨지는 세상에서 죽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부활이라는 또 다른 길과 그 길을 걷는 새로운 존재,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부활의 커밍아웃을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는 언제나 그렇듯 이상하고, 기존의 질서와 대치되는 새로운 모습, 새로운 존재이기에 세상은 그를 위협으로 느끼고, 그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를 혐오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인정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관계없이 부활하신 예수, 죽음이라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와 상관없는 예수라는 존재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를 혐오하고, 그를 위협으로 느끼더라도, 예수는 세상에 존재합니다. 가장 특별하고, 가장 놀랍고, 가장 대단한 존재가 되어 세상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여전히 죽음 가운데 머무르려 하고,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예수의 제자로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며 문 안에 숨어서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는 예수가 잡히던 밤의 그 베드로처럼 예수의 제자이기를 숨기고, 감추며, 부인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한 사람을 찾아 가셨습니다. 도마를 만나 예수는, 그에게 부활을 확인시키고, 그 부활에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며, 그래서 도마로 하여금 이 부활의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너도 이 믿음 가운데로 나와서, 이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존재로서 세상으로 나가라고 벽장 속의 도마를 커밍아웃 연대 가운데로 초대하십니다.

도마는 디나이얼 퀴어입니다. 그는 기존의 질서와 규정과 다른 예수의 부활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세상에 자기 존재를 감추며, 벽장 속에서 살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도마를 찾아오셔서, 기존의 질서와 규정과 다른 퀴어함, ‘부활에 능력이 있고, 그것이 존재 그 자체로 놀랍고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 주셨고, 이제 도마는 그런 예수와 함께 벽장 문을 열어 젖히고 세상에서 부활의 증인, 부활의 추종자가 될 것입니다.

도마를 찾아오신 예수는 퀴어 사람들을 찾아오는 분이십니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하지 않고, 두려움 가운데 숨기고 감추는 것을 선택할 때, 예수는 그런 퀴어 사람이 숨어 있는 곳의 문을 열고 찾아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말씀하시며, 이제는 그들 또한 자신들의 벽장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2주에 걸쳐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이 도마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저는 이 이야기가 말하고 보여주고 있는 퀴어함, 커밍아웃 스토리를 이렇게 깨닫고, 생각하며,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도마를 찾아오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벽장 속의 퀴어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숨기고, 감추며 두려움 가운데 있는 퀴어 사람들을 먼저찾아오셔서, 그들의 존재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그들이 존재 그대로 있더라도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일깨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세상에서 퀴어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혐오하기까지 하는-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퀴어함, 그분의 부활은 무엇보다 특별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 퀴어함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함께하자고, 함께해도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라는 퀴어함으로부터 시작된 공동체입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고, 세상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며, 세상이 혐오하기까지 했던 퀴어 공동체, 그게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어느 곳에서나, 처음 그 공동체를 시작하고 전할 때 그들의 퀴어함으로 인해 비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수용하고 함께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비난하고 박해했고, 로마인들은 부활을 믿으며 예수를 구원자, 신, 왕이라고 말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사회의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기독교가 조선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역시 신분과 성별의 차이 없이 평등을 외치고 실천하며, 또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중지하려 했기에, 박해와 살육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기독교 공동체는 퀴어했기에 혐오와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그들의 퀴어함을 잊고, 지우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퀴어 사람들을 혐오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이 얼마나 퀴어한 사실인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열심이 얼마나 이상하고 괴이한 것인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힘은 퀴어함으로부터 나오며,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 퀴어한 존재들과 함께 했을 때 가장 빛나며 가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또 한 번의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다시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도마를 찾아오신 퀴어한 부활의 주인공, 퀴어한 예수를, 그가 보여주신 부활이라는 커밍아웃과 그 커밍아웃 연대로의 초대를, 기억하고 또 참여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기독교이며, 그것이 부활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교회는 이 예수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의 부름에 응답했던 도마처럼 벽장을 열고 우리 존재 그대로 세상 가운데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는 또 다른 퀴어한 존재들을 찾고, 그들에게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퀴어함이 만드는 진정한 평화를 전하며 함께해야 합니다.

오늘도 두서없는 글이었지만, 이 부활 시기를 보내며, 요한복음 20장 본문을 통해 퀴어한 성서, 퀴어한 예수에 대한 묵상을 함께 나눠봅니다.

 "퀴어에게 평화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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