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16...기억과 기념
그 날, 그 목요일 하루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안산, 단원고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시흥 어느 부대에서 군목으로 복무중이었습니다. 고난 주간이었고, 부활절을 앞두고 부대 전체 위문을 준비하던 중에 사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했지만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보며, 단순한 해프닝이었구나 생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울릉도에서 근무하던 시절, 육지에 나오기 위해 자주 대형 여객선을 탔기 때문에, 그런 배가 침몰 했다니 배가 많이 낡았거나 어디 이상이 있었나보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곧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밤이 늦도록, 다음 하루가 되도록, 그 배가 가라앉는 것을, 추가 구조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들었습니다. 그 배가 가라앉는 광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게 11년전, 저의 4월 16일이었습니다.
그 날, 그 5월의 아침을 기억합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던 그
아침, 노무현 대통령께서 투신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내내 망연자실하며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서 뉴스를 읽고, TV 속보를 지켜봤습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팟캐스트 진행자가 자신은 그 날 이후 검은 넥타이 외에 다른
것은 매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접했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고, 양복이 작업복이 되었을 때, 4월 그리고 5월에는 노란
넥타이만 매고 다녔습니다. 그게 제가 그날들을 기억하는 방법이었고, 그 사람들을 잊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기념의 종교입니다.
성탄과 부활절기를 지키며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기념합니다. 일부 보수적인 교단들을
제외하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같이 성탄과 부활에 앞서 얼마 동안 기간을 두고 대림과 사순절기를 지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이토록 기념일을 정해서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은 단순히 그 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포함해서 성탄까지 그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사람으로 세상에 탄생했던 그 사건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왜 의미가 있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찾고, 되새기고, 기억합니다. 또 우리는 사순절기를 보내고 부활절을 기념하며 예수의 죽음,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인지를 찾고, 되새기며,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이렇듯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절기를 기념하여 지키는 일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억한다’는 행위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는 단순히 그 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구나 사건 자체를 ‘회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발생시킨,
그리고 그 때로부터 발화 된 ‘의미’라는 것을
찾고, 되새기고,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을 포함하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기념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물론 그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왜 굳이 그 사건과 사람을
기억해야 하며, 무엇 때문에 계속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지 그 사건과 인물 속에 담긴 의미를 찾고,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제되지 않는 국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신들만의 의로움과 억지 논리로 함부로 죽이고 짓밟을 수 있는지 기억하기 위해 4.3과 5.18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을
사람이 아닌 기계와 도구로 만들 수 있는지, 그 속에서 사람은 얼마나 처참하게 희생될 수 있는지를 기억하며
전태일을 기념합니다.
또 한 번의
4.16이 지났습니다. 나는 아직 어리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내가 왜 여기서 죽어야 하냐며 울부짖던 핸드폰 동영상 속 남학생이 생각납니다. 가만히 있으라 말하며 자신은 구명정에 올라 도망을 갔던 어른 아닌 그저 나이 많은 사람, 그
배의 선장이 기억납니다. 온전히 슬퍼하지 못하게 하며,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던 지도자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애도는 앞으로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음을 이긴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희망’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
당시 사람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여성’들이었습니다. 부활이라는 희망은 그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제공되는 것이 아닌 진짜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 정말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크고 놀라운 선물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며칠 앞두고, 다시 이 4.16을 지나며, 그래도 희망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함께했던 사람들 사이의 연대와 위로, 그래도 진리를 품고 의로운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과 끝까지 함께했던 사람들, 그 기억들과 역사를 지금 고스란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10.29 유가족들과, 다시 전장연 장애인들과, 다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억과 기념의 참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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