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교회의 종말 앞에서...

* 넷플릭스 드라마 '종말의 바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종말의 바보는 잘 만든 드라마는 아닙니다. 서사 구조도 구멍이 많고, 연출도 여러모로 많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공개 당시, 저는 오로지 유아인과 전성우에 대한 애정과 관심 하나로 이 드라마를 끝까지 완주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불현듯 이 드라마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길고 지루하고 엉성한 이 드라마가 생각나 다시 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전성우 배우가 역할을 맡아 연기한 한 젊은 사제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소행성의 지구 충돌이 예측되어 이제 꼼짝없이 종말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이 보내는 일상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안은진 배우와 유아인 배우가 주연으로 전체적인 이야기 진행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종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다른 인물들의 서사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하게 전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성당을 중심으로, 그 성당의 젊은 사제가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저에게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성당은 종말을 앞둔 사람들에게 구심점이 되어 주는 중요한 장치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종말의 시간을 보내며 여러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전개되지만 그때마다 신자들은 성당에서 드려지는 미사와 기도, 신자들 간의 교류를 통해 슬픔을 감당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래도 남은 일상을 살아 낼 힘을 얻으며 무엇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원래 이 성당의 보좌 신부였던 한 젊은 사제가 있습니다.

성당의 주임 신부는 종말이 예고된 직후, 모종의 사건이 지난 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사람들은 그 주임 신부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며 이제 남아 있는 이 젊은 사제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이어 갑니다. 신부는 젊고, 그래서 아직 많이 미숙했지만 그래도 성당 사람들을 챙기고 다독이며 최선을 다해 주임 신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신부와 사람들은 사라졌던 주임 신부가 사실은 그동안 성당의 헌금을 횡령하고 있었고, 죽은 것이 아니라 종말을 피해 소행성 충돌의 피해를 입지 않을 다른 나라로 도망가기 위해 모처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성당을 지키고 있던 젊은 신부에게 몰려와 화를 내고 항의하며 혹시 당신도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 한 패 아니냐 말하면서 그를 몰아 세웠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 젊은 신부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는 아무 말도,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합니다.

충격에 휩싸인 젊은 신부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하며 하느님을 향해 제발 무엇이라도 보여 달라고, 한 말씀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런 젊은 신부의 모습이, 이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가 제가 이 드라마를 떠올리고 다시 보게 된 이유였습니다. 왜 갑자기 이 재미없는 드라마가 다시 떠올랐는지 사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마 무의식의 이끌림이었을텐데, 이 젊은 신부의 모습과 서사에서 지금 한국 교회의 구조, 젊은 목회자의 상황들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성당의 터줏대감과 같은 노신부, 주임 사제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젊은 사제가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 이 성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신자들을 비롯해 지역 사회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그만큼 큰 영향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자들은 그 주임 신부를 크게 의지했고, 그를 통해 신앙심을 키우며, 그와 함께 자기 삶을 살아나갔지만, 사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이 주임신부는 사람들이 낸 성당 건축 헌금을 빼돌려 금을 사서 금고에 쌓아 두고, 종말이 예고되자 그 금을 가지고 신자들은 버려둔 채 도망차는 가증스러운 위선자였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된 사람은 주임 신부의 부재로 성당을 책임지게 된 이 젊은 보좌 신부였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며 종말의 시간에도 그들을 다독이고 책임을 다하고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 젊은 신부에게 주임 신부의 잘못에 대해 따지고 공격하며 책임을 묻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답을 구해 보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최선의 대가로 절망과 분노, 무기력이라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이 신부는 결국 나중에 신부직을 내려 놓기로 결정합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구세대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그가 감당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이 평생 꿈꾸던 일을 그만두는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종말의 바보에서 이 신부의 서사는 정말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지만, 저에게는 가장 크게 다가온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대에 망가진 교회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자기 자리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저 또한 깊은 분노와 절망, 무기력함을 경험했습니다. 선배 목사들의 그 행동들에 대한 결과와 책임을 그들이 아닌 우리 세대, 우리 다음 세대의 교회와 목사들이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배 목사들은 그것이 후배들이 게으르고 열정이 부족하며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안 되는 자신들의 영향력과 재산을 지키고 더 불리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조종하며, 자기 가족과 자식들에게 세습을 시도합니다. 불의에는 눈을 감고 그것이 은혜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의로움을 이야기하면 분열을 조장하고 교회를 망치려는 수작이라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그 목사들과 함께했던 교인들은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고 휘둘리며, 그러는 사이 제대로 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 종말의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이 때,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내야 할 목회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담하고, 무섭고, 무기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하기에, 그래도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교회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기 그 자리에 있다고, 구세대의 그 목회자들과는 다르게, 그래도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과 함께하며, 똑바로 된 정신과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믿고 있다고, 우리의 관심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약자와 소수자들,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향해 있다고 그들과,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말의 그 하늘이 다시 열리고, 종말이 희망으로, 생명으로, 다시 시작하는 시간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래서,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종말의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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