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 히브리인의 커밍아웃, 퀴어들의 해방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출애굽기 15 20~21절 (새번역)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히브리 사람들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는 일종의 커밍아웃 서사입니다.

요셉 이후 오랜 세대를 거치면서, 이제는 태어나면서 노예인 상태로 평생을 살았던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진짜 신분과 정체를 잊고, 알지 못한 채로 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집트의 왕자로 살고 있던 모세가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각하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서 광야로 추방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자기 자신 그대로, 히브리인으로서, 누구에게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만나게 되었고,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를 비롯한 모든 히브리 사람들이 실제로는 노예가 아니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때부터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만남 이후, 모세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하나님이 히브리인으로 정체화하게 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해 주신 그 경험을 굳건한 기초로 삼아,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정체를 다른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폭로하고 전합니다.  영화 바비에서 주인공 바비가 외부 세계로 나가서 자기 정체를 깨닫고, 자기와 같은 바비 동족에게 돌아와 바비의 진짜 위상과 역할을 알리며, 바비들이 종속되지 않고 독립된 개채로서 자기 주도적 삶을 사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처럼, 모세 또한 히브리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짜 신분과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전하고 그들 스스로 해방의 걸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첫번째 유월절의 그 밤,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문 밖에 양의 피를 바르고 이집트의 모든 사람이 누가 히브리 사람인지, 누가 그들과 함께할 것인지를 공개적으로 알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을 전달합니다. 마치 벽장을 열고 세상으로 나와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공개하고 드러내는 퀴어 사람들처럼, 그 밤, 히브리 사람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 자기 집 문에 피를 바르며, 자기 정체를 폭로하고 노출시켰고, 그것이 그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히브리 사람들은 세상이 강요한 노예라는 가짜 신분과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 히브리인이라는 것이 자랑이며 구원의 상징이 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고, 가짜 신분을 강요하지도 못하며,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는 해방의 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해방은 아직 제대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을 전하고 기적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그것으로 인해 그들 모두가 이집트를 탈출해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 그대로,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해방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해방은 자신들의 투쟁의 산물도 아니고, 자기들 스스로 열망했던 것도, 자신들의 참여의 결과로 얻게 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수동적이고, 불안하며,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앞에는 홍해 바다를,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현실과 타협해서 생존과 안전을 위해 전부터 익숙한 삶이었던 노예 생활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던 모세를 한 번 더 믿고, 혹은 나 스스로 내 자유와 내 진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걸음을 내딛는 선택을 할 것인가? 그들은 자유와 해방을 선택했고,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바다 가운데 자기를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위해 바다에 길을 내셨고, 그들의 선택과 발걸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는 두 가지 노래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홍해를 건넌 이후 모세가 감격하며 부르는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세의 노래를 이어 부르는 모세 누이 미리암의 노래입니다. 미리암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 모세 외의 다른 사람의 노래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출애굽기의 해방이 그저 모세만의 해방이 아닌, 모두의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성서는 미리암을 따라 모든 여인들도 함께 나와 미리암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세 홀로 주도하는 해방, 모세만의 커밍아웃이 아닌, 모두의 해방, 모두의 커밍아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제 어느 나라의 노예가 아닌 히브리인정체성 그대로, 이스라엘로서 자신들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그들은 여전히 갈등하고, 흔들리고, 다투고, 성내며 약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조차 모두 그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찾고 만들며 다듬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가득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은 모두 이 이스라엘 사람들, 히브리인들의 커밍아웃서사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이집트라는 벽장을 박차고 나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존재할, 자기들의 길을 찾고 만드는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역사에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나타나도록 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지나는 곳마다 그들을 보게 된 많은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런 그들을 지지하며 함께하시는 그들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으며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히브리 사람들의 모습, 이들의 발자취입니다. 우리는 이 히브리 사람들의 커밍아웃 이야기를 통해, 또한 퀴어로서 우리의 해방을 꿈꾸며, 용기를 내고, 우리의 삶을, 무지개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퀴어 행진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퀴어인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하실 때, 구름 기동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퀴어인 우리와 함께하실 때, 무지개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하실 것입니다.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제정과 동성혼 합법화, 퀴어 인권에 대한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가시화에 대한 생각을 같이 하게 됩니다. 법제정이 늦어지는 것,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도 퀴어 사람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가 점점 더 확산되고 강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법제화에 대한 노력과 더불어 더 많은 가시화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차별금지법 제정과 동성혼 법제화에 미온적이고, 한국 교회가 퀴어 사람들을 괴물죄인처럼 규정하고 낙인 찍는 일,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퀴어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에 무감각하고 오히려 그것에 동조하며 확산시켜 나가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이 사람들은 퀴어들이 정말 자기들이 무시하고 얕봐도 될 만큼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어디 구석에 숨어 있는 티끌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퀴어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나와 가까운 누구라도 퀴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실제로 눈에 보이도록, 퀴어들은 괴물이나 특이한 존재, 몇몇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더 많고 구체적인 가시화 인물, 사건들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 법제정도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서 퀴어 사람들을 성소수자로 지칭하는 것을 이제는 재고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글에서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며, ‘퀴어로 적고 부르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별도의 글에 따로 한 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히브리인들의 해방 사건을 커밍아웃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글을 쓰면서 잠시 가시화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운동으로서 가시화를 독려하고, 더 많은 퀴어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퀴어와 퀴어 앨라이들이 자기 존재를 밝혀달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섣부른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속상하고 또 참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의 해방 이야기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잠깐이라도 함께 이것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긴 사족, 그야말로 짧은 생각을 함께 적어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지난 시간과 경험을 통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퀴어로서 목사일 수 없다면, 목사를 계속하기 위해 퀴어인 것을 숨겨야 하는 선택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끔찍하고 치열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목사인 것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길이지만, 어떻게든 퀴어, 그리고 목사일 수 있도록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주시고, 광야에서 히브리 사람들을 인도하며 길을 내셨던 그 하나님이, 저와 만나주시고, 무지개로 저를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의견/문의사항 DM

Bluesky: https://bsky.app/profile/ryaninnj.bsky.social

Twitter: https://twitter.com/newshin1983

 *논쟁이나 욕설이 목적이 아닌 문의나 (반가운) 안부 인사를 담은 인스타그램, 트위터, 블루스카이 DM은 언제나, 누구나 환영합니다. 




돈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Venmo: @RyanJShin

하나은행 18391029397907 신**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두 번째 커밍아웃, 그리고…

“격려를 받겠습니다.”

다음주면 아파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