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교차성, 존중과 정 그리고 연대
전에 어느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퀴어이자 목사인 저에게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공동체였던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제가 당사자성을 가지고 소수자 인권과 그에 대한 신학 사조들을 접하며 알게 된 것은 ‘상호교차성 Intersectional’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 개념을 저의 이해를 기반으로 간략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어떤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이
어느 한가지 범주로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호 교차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제가 유니온에서 공부하며 접하게 된 신학 사조는 ‘우머니스트 신학
Womanist Theology’ 였습니다. 유니온은 제임스 H. 콘이라는 흑인 신학자를 중심으로 ‘흑인신학’을 체계화하고
확산시킨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제임스 콘의 제자들 중 흑인 ’여성’
신학자들은, 차별을 받는 소수인종인 흑인들의 억압을 다루고 있는 흑인신학에서 흑인
여성들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또한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는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에서는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음도 함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흑인신학이나 여성신학 모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해방과 권리
신장에 대한 내용을 신학적 고민과 연구를 통해 전개하고 있는 신학이었음에도, 흑인이며
여성인 사람들, 즉, 교차적 차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때까지의 연구가 충분하지 않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단의 흑인 여성 신학자들은 ‘흑인’,’여성’,’신학’인 ‘우머니스트 신학Womanist Theology’를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우머니스트 신학도 나중에 우머니스트 신학자들
사이에서 한 번 더 큰 학문적 논쟁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 논쟁의 핵심은 그렇다면
흑인이며 여성인 사람 중에 ‘퀴어’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학이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냐? 였습니다.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도 짐작하시는 것처럼,
흑인 공동체, 그 중에서도 흑인 교회 공동체는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또 진보적이지만, 퀴어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많은 흑인 교회들이 퀴어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죄’로 규정하는 가운데, 흑인 여성 신학을 전개하는 우머니스트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흑인이며 여성인
퀴어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그들과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논쟁이 크게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유니온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시점은 이미 이 모든 논쟁의
시간이 지나고,
우머니스트 신학의 큰 흐름이 퀴어 사람들을 아우르고 포함하는 쪽으로 정리되어 있던 시점이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알고 공부하게 되면서 저도 이 ‘상호 교차성’ 개념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유니온 출신의 아시안 퀴어 신학자인 패트릭 챙 또한 자신의 글과
책에서 이런 상호 교차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 인식과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패트릭
챙은 자신이 아시안이며 퀴어였기 때문에, 아시안 공동체 안에서도, 퀴어
공동체 안에서도 각각 소외와 차별을 경험했음을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패트릭 챙의 이런 문제인식과 경험은
정확히 저의 경험과 문제인식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
오픈리 퀴어 목사가 되고 싶었던 제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내 모습 그대로,
내 정체성 그대로 한인 교회와 함께할 수도 없었고, 내 인종과 언어 장벽,
문화 차이를 온전히 존중하고 이해하며 함께할 수 있는 미국인 교회나 신앙 공동체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고립감’이었습니다.
제 말과 정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 교회, 신앙 공동체는 제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곳들뿐이었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며 위축되어 있는 와중에 스스로 함께할 수 있는
미국인 교회 공동체를 찾아 정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저의 논문과 연구 주제를 ‘한국인 퀴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상담과 목회 활동’으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 쓴 글에서 언급한 드라마 ‘테일 오브 더 시티’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중에 나이차가 조금 있는 백인-흑인 게이 커플이 있는데, 이들 중 백인
게이가 자기 친구들의 모임에 흑인 애인과 함께 참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 백인 중산층 게이들이 자신들의
남미 여행 경험을 나누며 라틴/히스패닉 사람들을 성적 대상화 하는 농담과 차별 섞인 발언들을 이어가게 되고,
그 모임에서 홀로 흑인이었던 젊은 게이가 나머지 백인 게이들에게 차별이 담긴 농담과 표현을 멈출 것을 요구하자,
이 백인 게이들이 새파랗게 어린 네가 지금 ACT UP활동을 하고,
이성애자들과 맞서 싸우며, 퀴어 인권과 HIV 치료 보장과 평등을 위해 싸웠던 우리 앞에서 ‘차별’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냐?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혼인 평등을 비롯한 모든 권리와 안전함은 우리들의 투쟁의
산물이라며 맞섭니다.
상호 교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 드라마 장면을 언급한 이유는,
차별을 경험한 사람은 그 차별로 인해 또 다른 차별을 겪고 있는 또 다른 계층을 향해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연대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신의 차별 경험에 매몰되어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어떤 계층과
배경 속에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연대가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권은 파이 나눠 먹기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등한 권리 보장을 외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누리고 있는 권리를 빼앗아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차별 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차별 경험과 상황에 매몰되어, 내가 먼저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데, 너까지 나서면 내 어려움과 상황이 뒤로 밀리게 된다고
인식하기 쉽습니다.
상담 공간 안에서도 어떤 정서적 어려움과 곤경 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문제와 어려움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다른 어떤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는 내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인권에 대한 것도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 인권을 말하는 이들 중에 ‘트랜스젠더 혐오’, ‘외국인 노동자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하며, 자신이 퀴어 당사자임에도 너무 쉽게 외국인-특별히 외국인 노동자, 중국인, 흑인-들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민과 외국인 노동자 중에도 퀴어 사람이
존재하고,
여성 차별과 퀴어 혐오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장애인 여성, 장애인 퀴어, 모든 성별과 모든 직업, 모든 인종과 모든
사람 사이에 각각의 차별과 혐오, 어려움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어느
한 층위에 존재하는 차별만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을 받고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교차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그렇게 교차적인 상황 가운데 놓여 있는 또 다른 존재들과 항상 연대하며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성이며 퀴어,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이주민 신분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이웃 중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어느 하나도 부정되거나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덜 시급하거나 ‘나중에’라고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존재 그대로 마땅히, 그리고
충분히 존중을 받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창조와 구원의 정신, 의미이기도 합니다.
각박하고 힘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이웃과 서로를 향한 관심을 놓지 않고, 연대를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연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연대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인권 운동이라는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마땅히,
충분히 존중을 받고 존재 그대로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 일상에서 다만 이웃과 서로를 향한 관심을 통해 실천하고 살아내는 것, 딱 그 정도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이 사라져 가는
세상 속에, 그 ‘정’을 품고
서로를 보듬고 ‘함께’ 살아가면, 그것이 최고의 연대, 최고의 인권 운동이 되어 세상을 보다 나은 곳,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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