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 결국은 퀴어함Queerness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창세기 37장 19절 (새번역)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5절
(새번역)
오늘은 창세기에서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요셉에 대한 퀴어성서주석의 묘사와 배경설명을 읽다가 보면 어지럽고 아찔합니다. 안드로진이
등장하고, 모세 서사와 같은 구원과 입양에 대한 내용, 근친결혼,
동성애적 해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퀴어 사람들이 퀴어 관점으로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요셉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꼭 ‘퀴어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퀴어성서주석에서 창세기를 집필한 마이클 카든도 요셉이나 라헬, 보디발과 같은 사람들이 퀴어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카든은 다만 요셉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퀴어함,
퀴어 면모를 부각하고 그것을 통해 요셉에 대한 본문들을 퀴어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든의 설명과 해설을 기초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퀴어 사람들, 퀴어 그리스도인들이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 어떻게 퀴어
하나님, 퀴어 복음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요셉을 퀴어 사람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달리 화려하고 색이 많은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을 통해 요셉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퀴어 당사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요셉의 존재와 그의 삶의 궤적은 다분히
퀴어Queerness합니다.
요셉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분명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요셉은 요셉의 형들이 들에 나가 양을 치며 경제활동을 할 때, 아버지의 장막에 머물며 형들과 다른 일상을 보냈습니다. 요셉의 이런 모습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자신의 형 에서와는 달리 에서가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하며 외적인 경제활동을 할 때, 야곱은 안에서 어머니를
도우며 머물렀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유목민 공동체의 일상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장막에 머물렀다는 것 또한 이유가 되진 못합니다.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움직일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자기 몫은 해내야 하는 것이 그 때의 문화이며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형들과 가족들로 대변되는 그들의 가족/사회 ‘공동체’에서, 더군다나 화려한 채색옷을 입고 있는 요셉의 존재는 일종의 ‘특이점’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셉은 성경의 표현과 묘사에 의하면,
‘꿈꾸는 녀석’이었습니다. 거친 들에서 맹수로부터
양을 지켜야 하며, 따가운 햇볕과 험한 기후 속에서 직접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유목민 공동체에서
단지 ‘꿈꾸는 녀석’이었던 요셉은 쓸모없고 무용하며 귀찮고 성가시기까지
했던 존재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야기를 창조하고 전하는 사람, 일종의
예술가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전하는데 거침이 없고, 내일의
일과와 경제적인 상황을 계산하고 고려하며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 요셉의 존재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재미있긴 하지만, 실제로 별 효용과 가치는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람이 말은 또 너무 많고, 과하게 활기찼던 덕분에 형들의 잘못을 부모님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고자질쟁이, 나팔수가 되었으니, 그에 대한 평가도
박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셉은 무용한 존재를 넘어서서 적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을 것입니다.
창조적이며,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하고, 활기차며, 피부도
하얗고, 약해 보이는 아이, 일반들이 규정하고 생각하는 이반,
퀴어, 게이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는 이 요셉은 마침내 그들의 공동체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끝에 추방되어 크고 번성한 나라 이집트에서 노예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민자가 된 요셉은 그러나 그곳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고방식과
태도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발산합니다. 노예는 단순히 집안의 재산이었기에,
주인의 요구가 있다면 성착취에도 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사회였음에도 요셉은 단호히 그것을 거절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 요셉은 그곳에서도 꿈 작업을 멈추지 않습니다.
함께 갇히게 된 사람들의 꿈을 해석해주고, 그들과 함께 연대합니다.
남들과 다른 존재였던 요셉은 그렇게 ‘남들과 다름’이 결국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도구가 되어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고,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문제해결방법을 제시하면서, 단숨에 신분 상승과
사회 구조의 전복을 이뤄냅니다. 그것을 토대로 이방인들의 구원자가 된 이 이민자는, 그들의 땅에 자신의 가족을 초대하며 그곳을 이민자들이 함께 공존하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회복과 연대의 공간으로 바꿔냅니다.
꿈꾸는 녀석 요셉의 모습은 그가 퀴어 당사자인지 아닌지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퀴어함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구원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요셉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퀴어함에 대한 긍지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무지개를
구원의 약속과 상징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퀴어함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남들과 다른 존재들, 다수와 구별된 특별한 생명들이 왜 존중되고, 보존되며, 함께해야 하는지를 창세기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퀴어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며,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구조와 문화가 우리의 존재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감추고 숨기기를 강요하며, 소위 ‘정상성’을 요구하지만,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는
그런 퀴어함이 오히려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를 명확하고 찬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함과 퀴어함을 요셉 안에 두신 하나님은, 오늘도 특별하고 퀴어한 우리 퀴어
사람들을 또한 그런 세상의 구원과 풍성함 가운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퀴어함이 도리어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며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이렇게 계시하며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퀴어함을 부끄럽게 여기며,
죽이고 말살하려는 사람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이 요셉의 삶을, 요셉이 꾸었던 꿈들을, 요셉이
만들어 낸 구원과 업적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으나 언제나 요셉을 돌보고 계셨고,
요셉의 편에 서 계셨으며, 이 특별하고 구별된 사람 요셉과 함께, 요셉을 통해 세계의 구원을 이루고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퀴어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세상을 다듬고 만들어 나가기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퀴어 사람들을 외면하고,
마냥 정죄하며, 우리를 죽이려고 덤비는 것 같을 때, 그럴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퀴어함을 잃거나 숨기며, 꿈꾸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과 맞서며 세상 앞에 나설 때, 우리는 우리의 다정함과 연민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고, 자신을 잃거나 숨기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 감옥에 함께 갇히게
된 사람들, 세상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삶과 현실을 그저 외면할 수 있었지만, 요셉은 오히려 다정함과 연민으로 그 세상을 대면하고, 그들과 연대했으며, 그래서 마침내 꿈을 꾸는 능력으로, 자신의 특별함과 퀴어함으로 한 사람, 한 세상을 구원했고, 그 세상과 구원은 더 큰 세상과 구원으로 이어지며, 자기 자신의 삶의 전복과 세계의 구원을, 진보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특별함과 퀴어함을 잃거나 숨기지 맙시다.
꿈꾸기를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글의 제목은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 교수 현경의 책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를 차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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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을 비롯한,
앞으로의 퀴어 관점에서 성경 읽기 글들에 대한 부연 설명:
이제는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는 퀴어성서주석을 읽어 보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한국어로 퀴어성서주석이 번역되고 나서 지금까지도 여러 공동체 안에서 독서 모임들을 진행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 이 책은 ‘주석’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인 것에 더해, 그 형식도 사전식이
아닌 해설서에 가까워 분량이 방대하고 쉽게 읽기 힘든 책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퀴어성서주석이 보여주고 있는 해석들이 한국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설령
퀴어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걸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고?’ 싶을
정도로 과감하고 진보적인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에이~ 그래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셨던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퀴어성서주석의 집필자들은 모두 이미 성서학계에서도 확고한
자신의 위치와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해석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국인들이 길들여져 있는 보수적인 기독교 세계관과 성서 해석에서
조금만 더 용기를 내고, 성서 해석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의 해석들을 탐구하며 성경을 읽어 나간다면, 퀴어 당사자로서 혹은 퀴어
앨라이를 지향하는 분들까지, 성경은 퀴어 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말하고 있고, 퀴어 관점에서 이해하고 수용하며 붙들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지를 고민하며 더 깊은 신앙의 세계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써 내려가는 글들은 바로 그런 과정에 약간의 도움을 제공하는
쉬운 안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퀴어성서주석의 해석들에 저의
관점과 신앙의 색채를 더해, ‘주석’의 내용을, ‘설교’와 ‘에세이’
정도의 언어로 풀어낼 것입니다. 사실 ‘주석’이라는 것은 성서 해석을 돕고, 그것을 통해 설교와 성서 해석을 전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공되는 어느 정도 전문서적에 해당되는 책이기 때문에,
분량도 방대하고, 해당 필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한 선이해와 배경지식들이 필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석이라는 것은 일종의 도매 과정이며, 도매상을 위해 그것을 구입한
소매상(설교자)은 그것을 잘 다듬고 전달하기 쉬운 언어와 생각을 더해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제가 쓰게 될 글들이 바로 그런 일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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