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 : 이 무지개와 같은 저 무지개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나는, 너희와 숨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창세기 9장 12절~16절 (새번역)
노아와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소수자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퀴어 신학이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
퀴어 신학에 기초한 성서학자들이 시도했던 작업들 중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 퀴어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퀴어함’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며 성경이 퀴어에 적대적인
기록이 아님을 밝히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과 나오미, 다윗과 요나단,
자신의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 찾아온 로마인 백부장, 사도행전에 나오는
에티오피아인 내시와 같은 인물들을 퀴어 사람으로,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퀴어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임을 강조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예수를 퀴어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채색 옷을 입었던 요셉이나 형인 에서보다 조용하고 요리를 잘 했던 야곱을 퀴어로 설명해 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도들은 보수적인 교회와 신학계에서 당연히 큰 반발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시도로
인해 전에는 한 번도 성경을 ‘퀴어하게’ 읽고, 해석하며, 적용해 볼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도 퀴어하게 읽고 해석해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했고, 그런 의미에서 그 때의 선구자적
퀴어 신학자들의 노력은 그저 이상한 궤변이나 과한 상상력이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위에 언급된 인물이나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두 ‘퀴어’ 당사자이거나 퀴어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다윗과 요나단이라든지, 예수를 퀴어 당사자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한 논증과 논거가 조금 더 쌓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인 백부장이나 에티오피아인
내시를 각각 게이와 트랜스젠더/논-바이너라/젠더퀴어로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에는 충분히 동의하며 공감합니다. 제가 이렇듯 각각의 인물에
대한 해석에 개별적으로 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는 근거는, 성서 외적 근거와 요인들을 통해 이 인물들을 퀴어,
퀴어 관계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와 성서 내적 근거와 요인-본문과 본문 사이의 관계성,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시대 문화적 배경 등-만으로도 그런 해석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입니다.
저는 오히려 성경이 퀴어 친화적이며,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진리가 퀴어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성경의 인물들을 굳이 ‘퀴어’로 해석하진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퀴어 사람이 존재했든지, 그렇지 않든지,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진리는 이미 충분히 퀴어 친화적이며, 퀴어 사람들을 환대하고
환영하며, 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퀴어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퀴어 사람들은 구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내가 퀴어인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퀴어인 내가 내 존재 그대로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며 관계를 이어가려는 것을 막고 방해하려는 마귀의 공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퀴어한 성경 해석’이라는 작업을 이어갈 때, 물론 저도
앞서 언급한 몇몇 사례들은 -로마인 백부장, 에티오피아인 내시,
룻과 나오미 등- 퀴어 인물로 설정하고 해석하는 시도를 하겠지만, 그것이 저의 ‘퀴어한 성경 해석’의 주된 작업이며 방향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성경에 존재하는 수많은 본문들을 퀴어 당사자인 우리가
어떻게 퀴어의 눈으로, 퀴어의 삶으로, 퀴어의 마음과 퀴어의 영혼으로 읽고, 해석하며, 수용하고,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한 인물, 노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노아는 퀴어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조금 과격해 보이는
성서학자들 중 어떤 분들은 홍수 이후 함이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아버지 노아의 모습을 보고 형들에게 알린 구절을 동성 부자 간의
상간, 추행, 성관계 등으로 해석하는 입장도 존재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서 노아와 그의 아들을 퀴어로 규정하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노아를 그의 시대에 존재했던 소수자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합니다. 이미 네피림으로 불린
용사들이 존재했던 시기였고, 가인의 자손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노아가
살았던 시대와 겹쳐서 생각해 보면 노아가 살았던 시기는 힘의 논리에 의해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피와 살육이
난무하며, 자연 만물이 신음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런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있던 한 사람, 한 가족이 있었고, 그가 바로
노아였습니다.
창세기 6장에 따르면, 노아가 살고 있던 세상은 네피림이라고 불리던 힘 있는 사람들이 명성을 얻었던
시기였고, 그런 힘의 논리에 의해 세상은 죄가 가득했으며, 사람들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노아의 가족은 소수자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힘의 논리에 굴종하지 않았고, 자연을 돌보고 함께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노아가 오히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알려주고 있는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약자와 소수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강하고 다수였던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을 더 잘 되고 부유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기골이 장대하며 준수하고 연륜도 있었던 사울에 대항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인물은 어리고 약한 다윗이었고, 히브리 성서의 세계관에서 세계 최강대국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에 대항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도망자인 모세였으며, 야곱의 아들들 중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시키고 자신의 가족과 그 당시 온 세계를 구원한 사람은 어리고 힘이 약한 아들이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히브리 성서의 기록을 구전하고 전승한 히브리 사람들, 유대인들은 당시
그들의 세계, 고대 근동에서 가장 약하고 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던 아브람을 찾아내셔서 그를 선택하시며, 힘 없고 보잘 것 없는 그의 자손들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한 민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은 약자와 소수자들의 하나님입니다.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인 노아 또한 당시 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택하시고, 나머지 다수를 모두 쓸어버리며 이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가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노아와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퀴어 성서 주석에 따르면, 일군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홍수를 예고하시고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하는 동안 노아가 그렇게 방주를 만드는 일 외에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아무런 노력이나 시도를 하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맞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이 시기의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것 외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이런 모습은 지금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나와 내 가족만 구원을
얻고, 복을 받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한국 교회 안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이런 노아의 모습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퀴어 성서 주석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노아의 모습 또한 우리가 반면교사적인 측면에서 배우고 적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노아를 조금 변론하며 그 안에서도 취할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 보자면, 노아는
그 당시 악하고 힘의 논리에 의해 서로 죽이고 피를 흘리며, 아울러 다른 모든 자연 만물에 대한 존중 또한
없었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약하고 힘 없던 존재들인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을 방주에 태우고 보존하며, 그 방주를 통해 오히려 약자들의 연대를 이룬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도 동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식물과 자연 만물이 짓밟히는 것을 아파하지 않을 때, 노아는 죄 많은 절대 다수의
인간들을 살리고 보존하는 대신, 이 약하고 힘 없는 존재들을 살리고 보존하는 일을 해냈습니다.
그가 다수자인 인간 대신 소수이며 약자인 자연 세계를 방주 안에 보존함으로 인해, 지구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 교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무지개를 걸고 약속하십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이것이, 내가,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다."
무지개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약하고 소수였던 존재들이 살아 남아 우주를 회복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알리고 있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는 이제 다시 우리들의, 퀴어의 상징으로 이 세계에 휘날리고 있습니다.
무지개 깃발을 바라보며,
퀴어이며, 기독교인 된 우리들은 거기 담긴 생명과 회복, 구원의 약속을, 약자와 소수자들의 생존과 연대를, 그것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했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아의 무지개는 우리 퀴어들의 무지개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하나님은 퀴어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무지개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생명의 상징, 세계에 대한 존중과 약하고 소수인 존재들의
생존을 알리는 표식이 된 것처럼, 오늘 우리 퀴어들의 무지개도 그런 약하고 소수인 우리 퀴어들의 생존과 구원,
생명과 사랑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무지개와 퀴어들의 무지개를 구별하고 둘 사이를 단절시키며,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둘은 다르지 않으며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노아에게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 퀴어 사람들에게도 그 때와 같은 마음,
같은 의지로 약속해 주시며 함께해 주시는 분, 퀴어의 편에 서서 퀴어를 보존하며
퀴어들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노아에게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퀴어들에게도 같은 마음,
같은 사랑으로 말씀하시며 함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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