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연대 그리고 거룩한 탄생 Queerness, Solidarity, and the Christmas 누가복음 1:39~45 (12222024 주일예배설교)
*이 글은 2024년 12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를 재구성하여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사복음서 중 예수의 탄생 과정을 담고 있는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방식과 관점은 굉장히 상반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 탄생 이후, 예수가 탄생한 사실을 가장 처음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들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런 사례들 중 하나의 예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설교를 통해 함께 살펴보려는 것은 예수 탄생
이전에,
예수가 마리아를 통해 아기로 이 땅에 오게 될 것을 처음 전하는 소위 ‘수태고지’
장면과 그 직후의 이야기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각 예수의 탄생에 대해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미리 고지를 받고 알게 되는 과정을 전하고 있는데, 그렇게
전달하는 방식과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의 탄생을 어떻게 예고하고 있는지 먼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이제 누가복음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장면을 두 복음서는 각각 다른 사람에게
다른 방법을 통해 전달되는 것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주며,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는 것을 만류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탄생이 요셉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전개되고 있으며, 예수가 탄생할
수 있었던 과정 또한 요셉의 동의와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를 임신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지 않으며, 그저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것을 요셉이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예수 탄생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같은 내용을 다른 방향에서 전달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 탄생을 예고 받는 사람은 임신을 하게 된 당사자인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은 오히려 요셉을 ‘마리아와 약혼한 남자’ 정도로
간단히 설명하고,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를 임신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전달합니다.
누가복음의 마리아는 마태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 탄생의 과정은 남성인 요셉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래서 요셉이
마침내 그 임신에 동의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면서, 마리아의
안전이 확보되었으며, 더불어 요셉이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하기 전까지 마리아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요셉이 마리아의 ‘보호자’ 임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이 예고되는 순간부터 출산 직전까지
그 사이에 마리아에게 요셉이 필요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이뤄진 임신과 함께, 마리아의 자기주도적 행동을 연속적으로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에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임신을 하게 된,
나이 어린 여성인 마리아는 요셉의 동의와 보호 아래 안전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마리아는 요셉의 동의가 아닌 자신의 동의로 임신 유지를 결정하며, 천사로부터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 또한 불가능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전해 듣고, 천사의 고지 이후 약혼자 요셉이
아닌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는 아직 어리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태인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당시 사회에서 뒤따라올 무서운 판단과 혐오의 말들, 더 나아가 재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을 의논할 상대로
약혼자인 요셉이 아닌 같은 여성 친족 엘리사벳을 만나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1장 39절부터
4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러 가기까지의 여정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저는 이 여정이 퀴어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는 ‘커밍아웃’의 과정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 그로부터 임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아이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언을 들었고, 믿음으로 그것에 동의하며, 자발적으로 임신 유지를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두렵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리아는 아직 나이가 많이 어린 여성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임신에 대해, (마태복음의 기록대로) 약혼자의 동의와 보호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무엇이든 뒷말을 이어갈 것이고,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부정한 존재라고 낙인
찍히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추방되거나 존재 자체를 지우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 될지도 모를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리아는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가고
있지만,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그래서 어쩌면 자기를 제일 잘 이해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이 사람조차, 어쩌면 나이 어린 자신의 임신을 책망하지 않을까?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부정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사람이 나를 내쫓거나 저주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그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퀴어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커밍아웃의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퀴어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밝히려고 결심할 때, 이 마리아처럼 염려와 두려움을 품습니다.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면 그 때부터 나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상대방은 그동안의 모든 우정과 연대와 상관없이 차갑게 돌아서며 나를
외면하지 않을까? 내 존재를 부정하고 불결하게 취급하고 차별하며 혐오의 말을 내뱉지 않을까?
수많은 염려와 걱정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결정들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을 향해 가고 있는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안고,
마침내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순간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마리아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환영하고 환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마리아는 가장 큰 축하와 축복의 인사를 받게 되었고, 가장 놀라운 환영과 환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환영과 환대,
축하와 축복 속에 마리아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의 안전을 확보하고, 안정감을 누리며,
자기 자신 또한 자기의 상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그제서야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노래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감사의 노래, 그 고백의
기도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1장 39~45절,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마리아 찬가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인 마리아의 자기 주도적 동의를 통해 임신 유지를 결정하며, 또 다른 여성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그 여성의 환영과 환대를 받으며,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는
축하와 축복 속에 비로소 안전할 수 있게 되며, 안정감을 누리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었을 때, 노래하고 감사하게 되었던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어머니 마리아의 여정,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탄생의 과정입니다.
실로 놀랍고 엄청난 커밍아웃의 현장과도 같은 이 장면을 우리는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보전하며 우리가 전달받은 것과 같이 계속해서 전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보여주고 있는 구원의 모습이며,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며,
사랑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도 또 한 번 그 놀라운 연대와 구원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지난 밤 남태령에서는 한남동에 숨어있는 내란 우두머리에
대한 수사가 계속 가로막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를 경찰이 가로막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광화문에서 헌법 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촉구하기 위해 모인 집회가 계속되는 중에, SNS를 통해
전달된 이 소식은 사람들을 다시 남태령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저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농민들과 연대했고, 퀴어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이 시대를 함께 바꿔 나가자고 촉구했습니다. 그 현장으로 닭죽을 비롯한 따뜻한
음식들이 배달되었고, 그 중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한 경찰이 보낸 음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형버스를 예약해 현장에 보내며, 사람들이 그 버스 안에서 언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밤새 시위가 계속되고, 국회의원들이
도착해 상황을 조율하면서, 마침내, 트랙터를 가로막고 있던 길이 열렸습니다.
이 트랙터들은 곧장 원래 목적지인 한남동으로 향할 수 있었고, 그 밤,
사람들은 서로의 연대를 통해 또 한 번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거기가 바로 크리스마스,
거룩한 탄생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현장은 존중과 연대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 농민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퀴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고,
함께 승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의 이야기를 돌아보며,
우리는 이 연대의 현장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아무 상관도 없었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타내며, 서로 함께 연대했습니다. 그리고 승리가 탄생했습니다. 작은 구원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완성하며, 배우고,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험과 배움이 그 날 거기서 멈추고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경험은, 이 역사는 이제 우리의 삶에서 다시 재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만들어내고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수용과 환대를 통해 연대하고, 서로를 돌보며,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주는 것, 그래서 여성이나, 퀴어나, 장애인이나, 이주민이나, 농민이나, 노동자나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들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 나가는 일들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완성되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영광과 평화의 성탄입니다.
의견/문의사항 DM
Bluesky: https://bsky.app/profile/ryaninnj.bsky.social
Twitter: https://twitter.com/newshin1983
*논쟁이나 욕설이 목적이 아닌 문의나 (반가운) 안부 인사를 담은 인스타그램, 트위터, 블루스카이 DM은 언제나, 누구나 환영합니다.
돈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Venmo: @RyanJShin
하나은행 18391029397907 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