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품은 교회 A church that embraces the future 사무엘상 2:18~21 누가복음 2:41~42, 48~52 (12292024 주일예배설교)
주일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성서일과를 확인하고, 히브리성서와 신약성서의 말씀, 복음서 본문을 읽으면서, 정해진 본문이 2024년 마지막 주일, 2025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읽고 나누기 적절한 내용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보와 PPT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제가 정했던 이번주 설교의 제목은 ‘미래를 품은 교회’ 였습니다.
제가 작성해 나누려던 오늘 설교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상 본문과 누가복음 본문에는 두 어린이가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2장은 하나님을 향한 서원 기도를 통해 마침내 아들을 얻게 된 한나가 그 아들을 하나님의
성막에서 자라게 하려고 엘리 제사장에게 데려왔고, 그래서 사무엘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성막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누가복음 2장 본문에서는 12살이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게 된 어린 예수가 부모님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하지 않고 남아 있다가 그를 찾으러 온 그의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나를 찾으러 왔냐고 반문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본문은 각각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조명되는 보기 드문 본문이며, 그 구조와 내용이 서로 매우 닮아 있습니다. 오늘 사무엘상과 누가복음 본문은 각각 이렇게 끝이
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도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두 본문은 모두 각각 자신의 시대의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또 감당하게 될 두 인물이 하나님 앞에서 잘 자라며, 사랑받고 주목받게 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본문을 통해 교회는 한 사람을 품고 기르는 미래를 위한 공간이며 소망과
사랑으로 사람들과 함께하는 곳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밤,
우리는 정말 너무 충격적이고 참담한 사고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심각한 항공 사고가 발생했고, 170여명의 분들이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사고 수습 과정 중에 있고, 참사의 원인에 대해서도 조금 더 면밀한 조사가 이어져야
하겠지만, 일단 비행기가 새와 충돌했고, 기장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발생하게 된 참혹한 사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종의 노후화나 기체 결함, 활주로 구조나 공항 측의 대처, 항공사의 무리한 운행 여부에 대한 것들은 계속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기에 지금 무엇 때문인 것 같다, 누가 잘못한 것 같다 등을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래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나서,
정말 너무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단원고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경기도 시흥의 공군 부대에서 부활절 위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뉴스를 보며, 시간마다 참담함이 더해졌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목요일에 그 일이 일어났고, 주일이면 부활절이었는데, 부활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설교를 해야 하나 한참을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오늘, 다시 성탄절 후 첫 주일, 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슬픔 가운데 있을 수많은 유가족들에게 어떤 말씀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도,
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저는 참 어려웠습니다. 지금 슬픔 가운데 있게 될 많은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곳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그것이 저의 의문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오늘 설교를 통해 원래 전하려는 내용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본문의 배경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무엘상 본문에서 어린 사무엘을 둘러싸고 있는, 그 때, 이스라엘의 상황들, 누가복음 본문에서 어린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그 때, 이스라엘의 상황들, 두 본문 사이에 아주 오랜
세월의 차이와 골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각각 놓여 있는 시대 배경은 너무나도 유사했습니다.
사무엘의 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여러 명의 사사들이 중요한 시기에 한 번씩 등장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 또 그런 사사들이 없을 때는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잘 믿고, 율법을 따를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죽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사무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고, 편한 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분열하고, 서로 싸우며, 이방 민족들의 침략과 수탈이 이어져도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런 와중에
이 한 아이 사무엘이 여기 주님의 성막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준비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또한 주변 강대국들의 오랜 침략과 수탈
끝에,
로마가 그곳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귀족들,
종교 권력,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억압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위로를 경험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편에 서서 민중을 감시하고, 심판하고, 그 대가로
부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던 그 때, 어린 예수가
그들 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전에 나타나 이곳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무엘과 예수의 이 모습은,
각각 불의하고, 소망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런 와중에도 소망이 끊이지 않도록,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렇듯 참담하고, 어렵고, 답답한 시절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이 일하고 있긴 한 것인지,
정말 살아 계시는지 의문을 품기도 하며,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들은 그런 소망 없는 시기에, 하나님이 감춰져 있는 것 같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시는 것 같은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길을 준바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며,
우리가 마주할 교훈은 단순히 ‘미래’가 아니라,
어두운 시대에도 준비되고 있는, 여전히 살아 있는,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이 소란하고,
어둡고, 고통스러운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나서 그 슬픔과 참담한 현실에 대한 고통과
더불어 제가 하게 된 또 하나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하고 민망한,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나눠야 한다고 지금도 몇 번을 되뇌고 있는 것은, 이런 슬픔,
이런 고통 속에 웃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었습니다.
사고를 수습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 속에 얼마 간은 나라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간 내란 주동자를 단죄하고 심판하는 과정이 주춤되고 휘청거릴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좋은 명분과 시간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속에 심취해 있다는 어느 한 사람은, 그래서 어쩌면 이 일이 자신이 그동안 벌인 사술의 효과라
생각하고, 목숨을 잃게 된 분들을 자신들을 위한 제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자기들은 이제 살 것이라고 믿으며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용하기 너무 조심스러운 단어이지만,
적절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아 제 한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표현하자면, 저는,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이게 바로, 진정한 ‘영적 전쟁’이라고 판단합니다.
나라와 시민들을 볼모로 자신들의 안위를 확보하고,
사욕을 채우며, 죄를 감추기 위해 군과 경찰을 동원하며 전쟁을 유도하려고 했던 그
무리들은 그 모든 사특한 계획 속에서도 주술과 무속의 힘이라면 그 모든 것이 순조로이 잘 풀리고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그런 그 사람들에게 동조했던 소위 보수적이고 여론을
주도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의 그런 면모를 비판하거나, 죄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도 그들을 동정하며, 여론을 호도하고,
그들의 죄를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시대의 엘리 제사장 가문처럼,
예수의 시대에 그 성전에 가득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처럼, 그들은 진실에는 눈을 감고, 사람들은
돌보지 않으며,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에만 급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현실이, 바로 거대한 영적 전쟁입니다. 진리를 가리고, 현실을 외면하고, 그저 복을 구하며,
자기 살 길만 찾기 위해 신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짓밟고 제물 삼는 것을 용인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용하는 이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 아니 그런 마귀들에 맞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속히 하시도록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의 자리에서 해 나가야 합니다.
벌써부터 사고가 일어난 지역을 두고 비하와 혐오의 말들이
SNS에 노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대기업인 항공사의 책임을 가리기 위해
사고의 이름을 항공편이 아닌 지역 공항을 강조해 명명하려는 흐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악한 일들을 계속해서 감시하고 지켜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해내야 합니다. 사고로 슬픔 가운데 있게 된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이 상황을 호도하고 이용해 자신들의 살 방도를 마련하려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바로 그런 시대, 그런 현실에서도 사무엘과 예수와 같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들의 키우고 길러냈던 교회의 역할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우리의 할 일을 해 나가면, 그리고 기도하면, 그래도, 희망이 역사를 만들고, 위로와 사랑으로 서로
함께하며 연대할 수 있도록 하고, 그래서 진보를, 그래서 회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일을, 새해를 맞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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