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퀴어한 예수의 퀴어한 탄생을 퀴어하게 기다리는 시간 - 첫번째 이야기
제가 담임을 맡고 있는 뉴저지 하늘뜻교회는 이번 주일 예배를 대림절 넷째주일 예배와 성탄절 예배를 겸해서 드립니다. 저를 제외하고 두 가정이 함께 예배하고 있었는데, 이번 주일은 한 가정이 참여를 못하셔서 작고 조촐한 성탄 예배가 될 것 같습니다.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이번주 성서일과를 확인해보니 복음서 본문이
누가복음 1장 39절부터 45절까지
말씀으로, 예수를 임신하게 된 마리아가 그의 친족인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 기록된 부분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제가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게 된 이후 벌써 적어도 세 번 이상 설교했던 것인데,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같은 본문을 설교하더라도 항상 다른 말이
나오고,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
와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물론 많았지만,
공부하는 가운데 얻게 된 유익이라면, 성경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는,
그래서 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주님,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은혜를 만나고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누가복음 1장 39절부터 45절까지의 내용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면,
전에 이 본문에 대해 설교할 때는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마 예수님의 어머니를 맞이하러 나온 엘리사벳, 뱃 속의 아이를 축복하며 그 아이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예언과 같은 인사에 초점을 맞춰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사실 누가복음
1장 전체,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 탄생에 대한 서사를 놓고 보면 이 부분은 아주
짧은 부분이기 때문에, 조금 전에 설명한 그대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이제는 이 본문이 단순이 그냥 지나치는,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정도의 본문으로
다룰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흑인신학과
흑인여성신학-우머니스트 신학-을 배웠고, 우머니스트 신학을 통해 여성신학을,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페미니즘을 학문적으로 깊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제가 그 배움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본문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이 장면은 그저 예수 탄생의 과정에서
잠시 지나치는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 그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두 여성의 위대한 ‘연대’를 담은 장면으로 새롭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모두 각자의 세대의 소수자와 약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나이 어린 미혼모이며,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역량과 능력과 관계없이) 실패자로 낙인 찍힌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에 예상하지 못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과 소망인 동시에 두려움을 안겨주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약혼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고, 또 마리아는 아직 많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예고와 약속을 통해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임신은 소망이며 기쁨이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정죄와 판단을 받고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시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약혼자가 그를 보호하겠다며 나섰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임신은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으며, 다른 사람들 또한 계속 신경 쓰이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을 때, 그가 향한 곳은 그의 친족 엘리사벳의
집이었습니다.
엘리사벳
또한 늦게라도 임신을 하게 된 것이 기쁘고 희망을 다시 가질 수 있게 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평생동안 사람들의 말에 시달려왔기에,
이제 임신을 했어도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사람들을 피해 그 또한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여성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약자가 되었고, 기뻐하며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어도 모자를 시간을 두려움과
무서움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두 여성이 마침내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고, 누구보다 마음껏 진심으로 서로를 향해 최고의 축하와 축복을
건넬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이 만남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야 탄생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두 약자와 소수자가 만나 서로에게 위로와 기쁨과 평화,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하며 비로소 안도하고, 위로를 받으며, 안전함을 느끼고, 마음껏 기뻐할 수도,
미래를 꿈꾸며 자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고, 마리아는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은
성경이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예배와 성찬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두 여성의 연대 속에 세상의 구원자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나는 이 장면은 그래서 예수 탄생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성경은 이 기록을 남기고 전하면서 예수가 탄생하는 과정부터,
약자들의 연대, 소수자들의 활약이 있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글을 통해 알리고 전하겠지만,
성경은 이렇듯 약자들의 편에 서서, 소수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되는 사람들은 밤에도 추운 광야에서 양을 지키고 있어야 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는 다수가 만들어 놓은 사회, 종교 질서를 파괴하고
해체하며 가난한 사람, 이방인, 귀신 들린 사람, 성 노동자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다수 권력과
질서가 아닌 소수자와 약자들을 위해 일하시고 그들이 주인공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에수가 죽게 된 이유 또한
그가 약자와 소수자들의 구원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빌려 소수자, 퀴어 사람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여전히 남성과 여성을 가르며 남성 우위의 전통과 질서를 옹호하려고 하며,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으려는 교회와 사람들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거기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는
가장 이상하고 기괴한, 퀴어한 방법으로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퀴어한’ 예수 임신의 과정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그저 그 상황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고 환영하며 축복했던 것은 오로지 한
사람, 또 다른 여성, 엘리사벳이었습니다.
또
한 번의 성탄을 맞이하며,
퀴어인 우리를 퀴어인 그대로 인정하며 환영하고 축복하시는 예수를, 그의 복음을 이
엘리사벳의 모습을 통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통해 엿보고, 맛보고,
그리며, 온전히 나의 기쁨과 희망으로 취할 수 있는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까지, 퀴어한 예수님에 대한 글을 몇 개라도 더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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