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기도, 우리들의 노래 Hannah’s Prayer, Song of Us 사무엘상 2:1~10 (11172024 주일예배설교)
한국에서 군목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 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퀴어인 그대로 목사로 일하며 살 방법을 찾고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유니온이라는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도 잘 모른 채 미국에 지원했던 여러 학교 중 유니온에서 입학 허가가 왔고, 뉴욕이라는 위치도 마음에 들어서 전역을 결정하고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에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유니온이라는 학교는 단순히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곳이며, 한국인 교수인 정현경 교수가 있고, 그 사람도 아주 나쁜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유니온에서 공부하면서 유니온이 흑인 신학의 중심이 된 학교이며,
그와 더불어 흑인 ‘여성’신학인 우머니스트
신학을 연구하고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회와 가톨릭, 유니테리언과 퀘이커 등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시크교와 이슬람, 불교, 불교 유니테리언과 도교 등 여러 종교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 인도, 미얀마, 케냐와 독일 출신의 다인종과 무엇보다
신학을 하고 있는 퀴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주 놀랍고 큰 경험이었습니다.
아시안이면서 미국에서 살게 된 ‘퀴어’ 사람이 된 저는 퀴어로서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단순히 ‘퀴어’라는 정체성만이 저의 소수자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주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소수자 정체성 연구의 중요한 개념인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저와 같이 하나의 소수자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닌,
미국에서 ‘소수’ 인종인 ‘아시안’ 이면서,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소수자성이 교차하고 있는 사람들을 정의하는 개념이었습니다.
퀴어 아시안으로서 한국인 퀴어 크리스천들을 위한 상담과 사역에
관심을 두고 있던 저는 유니온에서 논의되었던 흑인신학, 특별히 흑인여성신학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머니스트 신학은 역시 미국에서 차별과 억압의 상징과 같은 이들인 흑인들에 의한,
흑인들을 위한, 흑인의 신학인 흑인 신학이 유니온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발전되던 시점에,
그 가운데서도 흑인 ‘여성’들이 그렇다면,
그 흑인 신학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어디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며 시작되고 전개되었습니다. 아울러 흑인 여성이면서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 또한 이 전개에 함께 참여했고, 그래서 이 우머니스트 신학은 소수자성의 여러 교차적인 지점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지금까지 계속 논의되고 전개되고 있는데,
저는 이런 우머니스트 신학자들의 교차성을 배경으로 한 우머니스트 신학과 제가 배우고 알고 있던 정신분석과 상담의 개념을
아울러 ‘한국인 퀴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목회와 사역’에 대한 정리를
했고, 그걸로 논문을 썼습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미국에서 지난 날의 저의 삶의 배경과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런 배경, 이런 과정들을 통해 제가-특별히 유니온에서의 경험들을 통해- 저를 포함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지향해야 할 신학의 방향과 목회의 초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니온에서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깨닫고,
굳게 믿게 된 신학의 지향점은, 신학은 억압과 압제, 차별과 그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 소외되고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신학은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처음 구성하고 기록하며 보존하여 신약 성서의 시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게 된 성서의 역사 또한 세계 역사에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와 같은 존재들이었던 히브리 사람들,
유대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발견하며 그들을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일하셨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예수의 삶과 사역 또한 그의 시대에 소외되고 차별과 억압 가운데 숨어 있던, 감춰져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은, 예수는 언제나 작고 약하며 힘이 없어서, 억압과 압제, 차별과 소외, 혐오의 대상이었던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한나가 주님 앞에서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나가 마음 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고, 그를 꾸짖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한나는 이스라엘 중에서
에브라임 가문의 엘가나라는 사람의 아내로 그와 결혼한지 오래되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 가문 중에서도 세력이 크고, 명망이 있는 가문이었고, 한나가 처음 엘가나와 결혼하며 그 가문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에게도 미래에 대한 부품 꿈과 희망,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고, 가문의 존속과 보존이 중요한, 남자 후손인 아들이 꼭
필요한 당시 문화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소외되고, 당연한듯이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 외에 브닌나라는 여성을 통해 아들을 얻었고, 그로 인해 한나의 처지는 더 곤란하고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나의 이런 상황은 우리가 지난 주까지 함께 살펴보았던 룻기에
기록된 룻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룻도, 한나도 모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 후손인 아들을 낳지 못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며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렇게 소외되고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회가 부끄럽게 여기고 감추고 없는 존재들처럼 여기는 이들을, 똑같이 감추고, 지우지 않고, 도리어 그런 그들의 상황을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전복시키고 도리어 역사의 중심이 되는 인물로 조명함으로써 성서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나는 수치와 고통 가운데,
그 수치스러움을, 그 고통의 내용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 한나를 보면서,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상황을 알려고 하기보다 괴이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는 그를 도리어 성소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있는 이 모습,
한나의 상황과 배경, 그리고 그런 한나를 저지하는 제사장 엘리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동일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워지고 숨겨진 여러 존재들이
자신의 고통과 차마 입밖으로 낼 수조차 없어 눈물만 흘리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편에 서야
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편에 서기보다 그들을 내쫓고, 지우며, 없애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도리어 그런 한나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하며 은혜를
베풀며 함께하셨는지를 전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제사장님, 나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려고 이 곳에 와서, 제사장님과 함께
서 있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주님께서 내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 아이를 주님께 바칩니다. 이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거기에서 주님께 경배하였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한나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한나를 지우고, 없애고, 쫓아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며 하나님께서 한나의 편이심을, 하나님께서 한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그래서 숨기고 감추고 지우려던 존재인 한나를 밝히 드러내, 영광을 얻을 수 있게 하고, 도리어 자랑하며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한나는 자기를 쫓아내려던 사람 앞에 자기 기도의 응답인 아들을
보여주며 역전과 전복의 순간을 만끽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상
2장 1절부터 10절의 말씀은 그런 한나가,
전에는 입을 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수치와 부끄러움, 슬픔과 고통으로 울음을
머금고 입만 달싹거렸던 그가, 이제는 모든 사람 앞에서 큰 소리로 큰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외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로 믿고 따르며 기억해야 할 하나님은 이렇게
한나처럼 모두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이며,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의 편이 되어 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과 역사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주님을 따르고 전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여기저기 많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대의 한나와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한나와 같은 억압과 고통 가운데 있는 여성들,
앞에서 저의 이야기를 하며 잠깐 언급했던, 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있는 퀴어 사람들,
이런 저런 사정과 상황으로 본인의 고국이 아닌 외국과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러 곳의 이주민 노동자들과 난민들,
장애인들, 소수인종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 한나의 하나님이셨던 성서의 하나님, 우리들의 하나님은 지금도 이들과 함께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이들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가 기억하고 품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사람들도, 한나와 같이, 이 한나의 기도를 외치며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전달자로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가 되고 우리들의 노래가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학의 방향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중 누군가가 이 한나와 같은 상황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과 반드시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의 편에 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여러분의 소망이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또 다른 한나를, 이 기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우리가 함께 끊임없이 찾고,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래서 이 기도가 계속 이어지도록,
이 기도가 우리의 노래가 되도록, 그렇게, 그런 교회, 그런 예수의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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