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겔 37:1~14 (03/29/20 뉴저지 하늘뜻교회 하늘뜻펴기(설교))
*이 설교는 2020년 3월 10일 제가 하늘뜻교회 담임목사로 막 사역을 시작했던 시기에 나눴던 것으로 당시 저희 교회에서 함께 예배했던 PCUSA 소속 이은주 목사님께서 저에게 원고를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어제 아주 오랜만에 이 목사님을 뵙게 되어 그 때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가 이 설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제 블로그에도 공유합니다.
(분량이 매우…깁니다.)
성찬의 예식을 행할 때 그 예식의 한 부분인 ‘봉헌 Offering/consecration’은 개신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헌금을 드리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 예식에서 목사 혹은 사제와 회중들이 함께 나누게 될 빵과포도주를 받아서 올려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봉헌에는 기독교의 각 교파마다 조금씩 다른 신학적 견해와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봉헌과 함께 사제의 축성과 선언을 통해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실제 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하지요. 루터는 그의 종교 개혁 과정에서 이 성찬의 빵과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실제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봉헌의 과정을 통해 예수께서 실제로 그 빵과 포도주에 임하신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공재설 consubstantiation’이라고 말합니다. 성공회는 예배 가운데 단순히 사제의 축성과 선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통해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 가운데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하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성공회는 ‘성사적 임재설 Real Presence of Christ in the Eucharist’이라고 정리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각각의 해석과 전통에 따라 이 성찬에 대한 견해를 조금씩 달리했는데, 크게는 ‘기념설Memorialism’과 ‘성령임재설 Spiritual Presence’, 두 가지 견해로 범주화 할 수 있습니다. 기념설은 성찬은 단순히 예수님의 마지막 저녁 만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견해이며, 성령임재설은 깔뱅이 가지고 있었던 견해를 따르는 것으로, 성찬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뀌는 것도, 그 빵과 포도주 가운데 예수님이 실제로 임하시는 것도 아니지만, 이 성찬 가운데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임재하심으로 빵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를 기억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념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에서 성찬을 자주 거행하지도 않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으며, 성찬의 과정에 봉헌이라는 시간 또한 별도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봉헌’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대부분 그냥 헌금 드리는 시간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1900 년대 중반 이후에 미국 교회에서 예배에서의 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예배학이 실천신학에서의 한 분야로자리잡게 되면서, 그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의 몇몇 주류 교단에서도 성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후에 한국의 신학교들에서도 성령임재설을 가르치면서 지금은 성령임재설에 따라 성찬 예식을 거행하고, 예식 중에 성령의 임재를구하는 기도를 하는 교회들도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치기 신학생이었을 시절에, 저는 가톨릭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쳐야 할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앞서 설명했던 가톨릭의 성찬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너무 미신 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학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신앙의 여러 경험들도쌓이면서 저는 가톨릭의 성찬 신학에 대한 제 견해를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제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저는 바르티안 Barthian, 신정통주의 Neo-Orthodox 정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 저의 신학적 입장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리버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여느 리버럴한 신학이나 교단들에 대해서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무오류에 대해서도 믿지 않고, 당연히 성서가 하나님이 받아쓰기하게 하셔서 기계적인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유니테리언 Unitarian 이나 이신론Deism 에 대해서도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저의 신학적 입장을 바르티안 혹은 신정통주의 정도로 말하는 이유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저의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신사도주의 New Apostolic Reformation 를 따르지는 않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온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은사 종결론을 굉장히 멍청한 견해이며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지금도 제일 많이 듣는 음악은 여러 형태의 찬양들이며, 애플 뮤직과 유튜브로 그것을 찾아 듣고 가끔은 아니 요즘은 자주 혼자서 웁니다. 좋아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서 듣고, 말씀을 때때마다 읽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신학과 신앙은 굉장히 이질적이고 어우러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신학과 신앙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그 괴리를 메우고 하나되게 하는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비 Mystery’입니다.
공부를 통해 신학적 지식이 더해질수록, 여러 해를 지나 신앙의 경험들이 쌓일수록 제가 확신하게 된 것은 바로 ‘신비’의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이 신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저의 인식과 이해의 폭 또한크게 넓어졌습니다.
신비는 저로 하여금 옹졸한 신앙과 신학적 사고를 벗어나 내 이해와 경험을 넘어서는 더 크고 놀라운 그 무엇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했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제 믿음의 뿌리이며 근간이 되었고, 제 신학의 가장 큰도구가 되었습니다.
앞서 장황하게 성찬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을 설명하면서 가톨릭이 따르고 있는 ‘화체설’에 대해 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했고,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대한 제 생각이 바뀌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것 또한 제가 신학의 여정과 신앙의 경험들을 통해 ‘신비’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면서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 또한 ‘신비’라면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봉헌의 과정 중에 사제가 빵을 높이 들고 복사가 종을 쳐서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게 하면서 그 때, 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그 과정 중에 사제가 들고 있는 그 빵이 예수의 몸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신비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비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을 때, 저는 가톨릭의 신학 또한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비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할 때, 제 안에 신학적 견해의 확장과 신앙의 진보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의 본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은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 그것도 이미 죽은 지너무 오래 되어 다 말라 버린 상태였던 뼈들의 골짜기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뼈들의 주인이 어떤 이들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강대국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자신의 동족 남유다의 군인들이 처절하게 학살당한 현장이었습니다. 그곳은 고통의 장소였고, 에스겔로서는 정말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의 장소였습니다.
성서일과에서 오늘 이 에스겔 37 장의 본문과 함께 주어진 요한복음 11 장의 내용 또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 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 오빠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들의 오빠가 죽고, 장례를 치르고, 이미 나흘이나 지난 이후에 그들을 찾아온 예수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동일하게 예수를 향해 소리 지릅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은 우리 편이실 거라고, 예수는 우리 오빠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에스겔과 마르다, 마리아자매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두 본문을 대하고 있는 우리 또한 지금 우리의 삶을 기억하면서, 내 고통의 기억들을 대면하면서, 아픔과 슬픔과 분노 가운데에서 그들과 똑같이 절규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거기 계셨더라면, 이 사람들이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그 때 계셨더라면,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지르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소망이 이미 모두 끊어졌는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여지도, 힘도 이제는 없는데, 주님은 물으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적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에스겔이 보았다는 이 환상이 정말로 있었던 것인지 여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이야기도 역사적으로 진짜 일어났던 사건인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이 정말 실존했던 인물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고, 요한복음에 기록된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사건 또한 단순히 가공된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이 정말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나도, 우리도 지금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슬픔의 상황 속에 있다면 그저 참고, 믿고, 억누르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소리지를 자격이 있음을, 싸우고 원망할 상대가 있음을, 그래서 분노하고, 목놓아 울어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래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성서는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다 체념해도 된다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원망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 두본문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사실로써 그 무엇이 아니라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 또한 어떻게 할 수있는지를, 무엇을 해도 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너는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분노하고, 마음껏 원망하라고, 그리고 힘들면 체념해도 된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나는 무능하다고 말해도 된다고 그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서, 성서는 아주 나지막이, 다시 나를 향해 하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그렇지만, “(그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아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다 끝났지만, 아무런 가능성이 없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그저 당신의 말을 따라하기만 하라고, 그저그 냄새나는 무덤을 막고 있는 입구의 돌을 치우기만 하라고, 그저 한 번만 다시, 조금이라도 좋으니 믿음을 가져보라고, 해보라고 성서는 나에게 권합니다.
신비는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인류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음을 당하고, 두려움가운데 놓여있지만, 자연은 회복되어 돌고래가 돌아오고, 거북이가 다시 알을 낳고, 대기가 맑아지게 된 것처럼, 신비는우리를 그저 슬픔에 자리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저 두려움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새로운 인식의 세계 가운데로, 또 다른 가능성과 소망 가운데로,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기적과 영광의 순간으로 인도합니다.
성서는 우리를 이 신비와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슬픔의 자리, 원망의 자리, 미움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서 신비를 품으라고, 그래서 무어라도 다시 해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의 말을 누군가에게 전하면 그것이 기적을 만들고, 신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서서 돌을 옮기는 수고와 봉사를 한다면 그것이 기적을 만드는 것을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저에게는 참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작년 5월쯤, 개인적인 문제와 어려움으로 한참 기도하고 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데, 그 때 제가 읽게 된 말씀이 바로 오늘 여러분과함께 나눈 본문 요한복음 11 장이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약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 오늘까지도 제가 기도했던 그 일은, 제가 바라고 소원했던 그 일은 제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번주에 설교를 하기로 하고, 정해진 성서일과의 본문을 찾게 되었을 때,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올랐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설교합니까? 내가 안 믿어지는데, 이걸 어떻게 가르칩니까? 설교를 작성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어떻게 나눠야 하는데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힘들었습니다. 본문에 대한설명은 할 수 있겠는데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비’가 생각났습니다. 제 신학의 지도였고, 제 신앙의 근거가 된, 너무 고통스럽고,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믿음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것, ‘신비’ 말입니다.
내 이해를 뛰어넘는 무엇, 내 경험보다 더 크고 놀라운 무엇, 바로 신비였습니다.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 군대가 되게 하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멀쩡하게 다시 살아나게 한 그 이야기가 저기 먼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는 역사이며, 증언이며, 그래서 소망이 되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신비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믿음을 가지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겹고, 고통스러운 이 때, 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고, 답답하고, 염려되는 지금, 이 때에, 저는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 또한 이 신비 가운데로 초청하기 원합니다.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또한 동일하게 질문하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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