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요엘 2장 27절-32절 103025 10월 큐앤에이 월례예배 설교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제일 잘 알고 잘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일하고 잘난 척도 했는데 제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고 한 글자도 안 맞았으며 실은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방해가 되고 있었던 적이 저는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첫 학기 때 전공 수업 중간고사 페이퍼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상담 수업이었는데, 이제 막 첫 학기 몇 달을 보낸 것이었기 때문에 배운 내용들이 너무 단순하고 개론에 불과한, 페이퍼에 인용할 것도 많지 않은 그런 시기였습니다. 저는 이미 한국에서 정신분석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간 상태였기 때문에,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제가 알고 있는 정신분석 이론들, 유명한 정신분석가들의 말을 꽉꽉 채워 인용한 페이퍼를 완성해서 전송했습니다.

첫 시험, 첫 소논문을 이 정도 했음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교수가 저에게 다시 보내온 제 페이퍼에는 전부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정말로 한 마디로 너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고, 한 글자도 안 맞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첨삭되어 있는 교수의 코멘트들을 모두 읽어보고, 또 같은 전공 박사 과저에 있는 한국인 학생 분에게도 물어보고 하면서 이내 제가 무엇을 실수한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막 유학 와서 첫 학기를 보내고 있는 유학생이었고, 교수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알고 있고, 이것도 공부했으며, 저것도 연구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이런 저런 이론과 인용들을 꽉꽉 채워서 페이퍼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수가 의도하고 요구했던 것은 너가 이 학교에 와서 학기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내 수업에서 내 말을 얼마나 잘 들었고, 내가 가르쳤던 것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페이퍼에 필요했던 것은 어떤 대단한 이론이나 인용이 아니라 그저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고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정리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공부를 정말 많이 하고 잘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 수업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단순하고 명확한 것을 저는 아주 어렵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우고 알게 되어서인지 그 때 그 경험이 제 인생에 정말 크게 각인되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오늘, 지금 이 시대의 한국 교회가 이런 태도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함께 읽은 요엘서의 말씀은 성서일과에서 이번 주일 구약의 말씀으로 지정되어 있는 본문인데, 저는 10월 둘째 주일 성서일과 구약의 말씀으로 지정된 예레미야 29장 말씀과 오늘 요엘서, 두 곳의 말씀을 두고 무엇을 본문으로 정해서 설교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이 두 곳의 말씀을 설교에서 모두 다루려고 합니다. 성서일과로 정해진 말씀들은 주마다 연결되는 어떤 흐름들이 있고, 한 주에 정해진 구약, 신약, 복음서의 말씀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는 말씀 또한 사실 하나의 흐름, 공통의 주제와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곳의 본문을 통해 잠시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예레미야 29 4절부터 7절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예레미야 29장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은 히브리인들의 유일한 왕국인 남유다마저 바벨론에게 유린당하고망하게 된 직후, 그 남유다 사람들 중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사람들을 향해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한 번 상기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 성서가 정의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의 원인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들을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때때마다 수차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왕국의 권력자들과 제사장들, 민중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서로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고, 권력 다툼을 이어가며, 과부와 고아, 이방인과 같은 약자와 소수자를 멸시하며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흔히 한국 교회에서 이 역사를 가르칠 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의 신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그 우상을 숭배하고 곁눈질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탐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저 이웃을 돌보며 서로를 해하지 않고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때 너희를 지키고 보존하며 번영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 하셨는데, 이방의 신들은 자신들을 믿으면 더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 마음껏 상대를 정복하고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 약속하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잊고 그 이방의 신들에게 의지하며, 자기 자신이 부자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하여도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빼앗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래서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계급이 형성되고, 누구는 지배자가 되며, 누구는 피지배자와 노예가 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또한 그 권력과 부에 기생하고 결탁하며 그들이 마땅히 전하고 가르쳐야 할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약자와 소외자들, 가난한자와 병든 자들이 생기는 것은 그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에 정하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그 일을 위해 봉사하는 가문의 사람들이 그 일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자, 하나님은 정해진 시스템 바깥의 사람들, 선택하신 예언자들을 통해 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의지가 없었고, 결국 그들은 경고 그대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또한 그런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예레미야서 전반에는 예레미야가 그렇게 권력에 결탁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싸우고 투쟁했던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의 역사서와 예언서를 읽다 보면 하나님은 정말 끊임없이 예언자를 등장시키셔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또 당시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그런 하나님의 경고와 예언을 무시하는 모습도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에 바로 그런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오늘 읽은 29장 바로 전에 28장과 27장에서도 예례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남유다 왕국은 괜찮다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고, 우리를 번영하게 하실 것이라고 권력자들을 비호하는 거짓된 예언자들, 종교지도자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반대편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도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었고, 가장 좋은 제물들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했고, 제사를 명복으로 백성들의 것을 착복해 자기 배를 채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았죠?

그들은 멸망의 순간에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의로움과 목적에 하나님의 뜻을 차용하고, 자기 열심을 인정해 달라고 말합니다.

제가 봉독해 드린 예레미야 29장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그곳에서 집을 짓고 가족을 이루며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차기까지 일상을 영위하며 삶을 살아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를 끝까지 읽어보면 그 와중에도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리 없다며, 바벨론의 총독을 죽이고 이집트로 도망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며 열정이었고, 민족을 위한 애국이며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멋대로 하나님을 향해 비싼 제물을 바치며 정작 하나님의 경고는 무시하고 둔감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이 사람들은 열심은 있었으나 정작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거나 따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틀린 답안지를 적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고 우깁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냐고 항변합니다. 정작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 자신들이 의롭고, 마땅히 할 도리를 하면서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맞지 않고,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여기서 순응하며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며 투쟁하라고, 그런 너희와 내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셔야 한다고 자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요엘서의 말씀 또한 부당하고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히브리 성서에 기록된 성령의 임재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전할 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정작 중요한 것,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인들의 세계관에서 사람은 오로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히브리인 성인 남성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언자는 그 예언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순화해서 번역을 해두었지만, 주요한 영어 성서들의 여러 번역본들이 이 모든 사람이라는 부분을 ‘Flesh’라는 단어로 동일하게 번역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 말로 만민’,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이 부분은 실제로 모든 몸뚱이’, ‘육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조금 달라지는데,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는 존재가 단순히 히브리인들이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모든 인류가, 모든 사람 존재가 하나님의 영을 차별 없이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아직 어린 아이들에 불과한, 그렇기 때문에 미숙한 존재로 여겨진 아들과 딸이 예언을 하며, 이미 그 생명이 다 끝난 존재와 같이 취급되던 노인들이 꿈을 꾸게 되고, 생각이 모자라고 지혜가 없는 존재로 규정된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종들에게까지, 그리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더 확장되어 사도행전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실제로 성령을 받고 경험하게 된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부어지고 임했다고 증언이 이뤄졌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자신들만 사람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히브리인’, ‘남성들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그저 살아 있는, 숨만 쉬고 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저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과 노인과 종들, 이방인들에게까지 부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세계관을 흔드는 엄청난 선언이고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예언은 실제로 성취되었고, 예수 이후 그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오순절 날이 되어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들, 이방인들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안에는 피하여 살아 남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살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면 다 구원을 받는 것, 하나님의 영을 받음에 있어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성서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한국 교회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것이라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믿지 않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고 역사하는 것에도 차별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입니다.

몇 해 전 미국의 애즈버리라는 아주 유서 깊은 감리교 소속 신학교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정기적인 채플을 진행하는 중에, 그 예배가 멈추지 않고 몇 날 며칠동안 이어진 것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까지 정말 문자 그대로 몇날 며칠동안 사람들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읽고 나누며, 찬양이 계속되는 예배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애즈버리에 부흥이 임했다. 예전 찰스 피니나 조나단 에드워즈 때처럼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막 떠들썩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도 이건 엄청난 사건이다 대단한 일이다 직접 가봐야겠다 어쩐다 하면서 몇 주, 몇 달 동안 아주 난리가 났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진짜 한순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구도 언급하기를 꺼리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를 주도했던 사람이, 예배를 계획하고 찬양을 인도했던 사람이 Elijah Drake라는 오픈리 게이 신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부흥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그 일들이 가능할 수 있게 했던 사람이 게이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한국 사람들이 정말 순식간에, 마치 볼드모트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해리포터 세계의 마법사들처럼, 애즈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너무 우스운 일 아닌가요? 이 사건이 나중에 교회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떻게 이름 붙여질지 알지 못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요엘서 본문의 내용과 너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오늘도 남자와 여자의 구분 없이, 노인과 어린 아이의 구별 없이, 인종과 장애 여부, 성적 지향과 성적 정체성과 상관없이 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부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든 사람과, 퀴어 사람들과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예레미야 시대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하며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고 생각하며 총독을 죽이고 이집트로 도망갔던 몇 명의 히브리인들처럼, 열심은 있으나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모습 보이고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기 그 사람들을 보며 빨간 줄을 긋고 그들의 행위에 오늘 이 요엘서의 말씀을 첨삭하고 계십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며 자신의 믿음이 더 우월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성전에서 기도하며 자랑하고 있는 바리새인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옆에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는 세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복 되다고 하신 예수를, 그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혹시 내가 퀴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아닌가? 스스로 자책하고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영이 바로 그분에게, 여러분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내 실패와 인생의 어려움과 우울함과 외로움이 내가 퀴어이기 때문이라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처럼 낙심과 좌절과 자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한 분을 향해 하시는 말씀은 네가 있는 그곳에 내가 있고, 네가 집을 짓고, 마음껏 사랑하며, 네 인생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도록 내가 너를 끝까지 보호하며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저 끝까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의 복음, 약자와 소수자, 병든 자와 가난한 자,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하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켜 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이 여러분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제야 너희는 알리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는 것을. 너희 하느님은 이 야훼밖에 없다.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요엘 2 27 (공동번역)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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