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 그리고 퀴어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장 11, 13~14절 (퀴어한 성경 해석: 퀴어 복음, 퀴어 하나님)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세기 16 11, 13~14 (새번역)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갈이라는 인물을 전통적인 관점에 따라 해석해 보면, 하갈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의 가족과 그들이 만들어 가는 족장 시대의 역사에 잠시 스치듯 등장하는 주변 인물, 아브라함의 오점 정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아브라함의 장자권 계승을 이스마엘이 했다고 보고 있는 꾸란과 이슬람 전통의 해석이 아니라 하더라도-미국의 흑인여성신학인 우머니스트 신학 Womanist Theology에서 하갈은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인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집트 출신의 노예 여성인 하갈은 아마도, 흑인이었을 것이고, 사라의 종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마찬가지로 흑인이며, 여성, 노예라는 전통과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미국의 우머니스트 신학자들이 주목할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머니스트 신학에서는 흑인 노예 여성으로서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그로 인해 탈출을 감행하며, 다시 돌아왔지만 결국 아들과 함께 내쫓김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하갈의 서사를 통해 자신들의 흑인성Blackness과 여성, 해방의 개념을 설명하고 강조하기에, 이 신학에서만큼은 하갈이 단순히 아브라함 가족의 주변인물이 아닌 해방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부각되고 작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갈은 종이었고, 어쩌면 주인의 종용에 의해 원하지 않았던 성관계와 임신, 주인의 가계를 잇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가 학대와 차별의 대상이 되고, 결국 버림을 받았지만, 그가 주인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향했을 때, 그리고 훗날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다시 광야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을 때, 그 순간 순간의 장면들을 살펴보면, 하갈이 그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기만 했던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잠시 조금 다른 이야기를 더하면, 하갈을 단순히 아브라함의 서사 속의 주변 인물이 아닌 주인공으로 그동안 우리가 배우고 익숙했던 관점들을 전복, 뒤집어서 생각해보며 그래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보는 것과, 하갈이 경험한 일들-아브라함과 동침, 임신, 도망 등-을 그저 단순히 표면적이고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면에 자리하고 있었을 법한 현실적인 가능성들을 함께 생각하며 해석해보는 것,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성서를 퀴어 서사로 해석하고 적용해 보는 것에도, 그리고 여타 다른 수많은 소수자의 관점에서 성서를 다시 읽고 해석해 보는 것에도 계속 적용될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갈은 종이었지만,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서사로 이루어진 창세기라는 책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여성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종이었던 하갈의 모습을 그의 주인인 사라와 비교해서 살펴보면 이런 것이 더욱 잘 부각됩니다. 사라라는 이름은 그 이름부터 여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창세기가 묘사하는 사라는 오히려 그리 독립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종속되어 있고, 아브라함이 자기 생존을 위해 사라 자신과 부부라는 것을 부정하고 속이도록 종용했을 때, 그런 불의와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는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라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라는 임무를 지닌 하나님의 사자들의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사라 자신의 임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내고, 궁금한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장막 뒤에서 비웃다가 들켜 무안을 당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하갈과의 관계에서도 사라는 매우 수동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라는 하갈과의 갈등을 능동적으로, 또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하갈에 대한 처분을 자기 남편 아브라함에게 떠밀다가 그 아브라함이 결정권을 자신에게 주었을 때, 하갈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무력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라의 모습은 그동안 기존 교회 공동체가 여성에게 가르쳐 온 아주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갈은 달랐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하게 되었을 때, 임신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주인과 맞섭니다. 그것이 주인의 눈에는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 하갈은 더 큰 학대와 억압을 경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 목소리를 냈던 것은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하갈의 서사에서 주목해 볼 또 다른 지점은 그의 주인이었던 사라는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지 못했고, 그저 장막 뒤에 숨어 목소리를 염탐해 들었을 뿐이지만, 하갈은, 하갈이라는 여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직접 대면하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리를 다른 누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전체를 두고도 꽤 중요하고 의미 있는데, 하갈은 창세기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를 직접 듣고 알게 된, 하나님의 사자를 직접 대면해서 만난 유일한 여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자를 유일하게 대면했던 여성은 바로 (여성이라는 소수자성 외에) 또 하나의 소수자성을 지니고 있던 흑인(그리고 히브리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이방인), ‘노예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갈 서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여러 교훈 중에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 한 사람, ‘소수자였던 이 사람과 만나고,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하갈은 이방인이었고, 유색인종이었으며, 여성이었고,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하갈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갈에게도 미래를 약속해 주시며, 생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주시며, 보호하시고, 함께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다름 아닌 작고 연약한 이 한 사람, 주변 인물, 소수자와 함께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의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읽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하갈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소수자인 우리들과도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대면해 만나시며, 우리가 그분을 대면해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분이 보여주시는 살 길을 보게 되며, 구체적인 생존의 경험을 하게 되고, 그분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그렇게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성서가 하갈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이 글은 원래 지난 주일(이제 지지난 주) 오전에 다른 글을 쓰고 난 직후, 연달아 쓰려다가 쓰지 못하고 일주일하고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다 쓰게 된 글입니다. 그 주일 아침, 잠에서 깼을 때, ‘오늘은 어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생각했습니다. 서울에 참 많은 교회가 있는데, 정작 퀴어이면서, ‘목사로 내가 있을 곳은 없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퀴어 정체성을 숨기고 감춘다면 갈 수 있는 교회, 예배드릴 수 있고, 나아가 일할 수 있게 될 교회가 참 많이 있다는 것이 그 교회들의 이름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퀴어인 그대로 어디라도 가서 목사를 하겠다고 지원한다면, 한국에선 그런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나, 그 아침에 참 막막한 가운데, 불현듯, 정말 아주 불현듯 하갈이 떠올랐습니다.

,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갈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와 만나며, 그에게도 살 길을 만들어 주신 분이셨지

그래서, 창세기에서 하갈에 대한 이야기를 찾고 읽으며, 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이후 여성이며, 이방인, 유색인종, 노예였던 소수자 하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저도 그렇게,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저의 광야인 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제는 만나고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앙망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누구라도 자신의 소수자성으로 인해 현실적인 어려움과 두려움, 고통을 경험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 또한 이 하갈의 하나님을, 소수자의 하나님을 어김없이 만나고 경험하게 되시기를 또한 간절히 두 손 모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퀴어인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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